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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늘 거기에 있었다

누구나 겪는 삶의 관문을 통과하며

by 현재 작가

남편과 휴가는 제주로 정했다. 휴가지를 물색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나의 인생에서 전환기 때마다 제주를 만났는데 이렇게 계획도 없이 떠나게 되니 새롭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은 늘 준비 없이 훌쩍 떠난다. 나도 여행 전문가인 남편을 따라서 준비 없이 떠나기로 한다. 배낭을 메고 떠날 준비를 하며, 10대부터 지금까지 만났던 제주를 떠올린다.


10대의 제주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처음 만났다.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저녁에 배를 타고, 밤에 도착하였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눈을 뜬 제주의 아침은 황홀했다. 내륙과는 전혀 다른 화산섬 제주의 푸른 바다, 야자수, 현무암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풍경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기억이었다.


대학 입시와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던 그 시절, 제주는 나에게 위로였다. 환상의 섬 제주는 나를 환상으로 이끌기 충분했다. 어떻게든 대학이란 관문을 통과한다면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한가득이었다.


20대의 제주는 대학 졸업 여행으로 만났다. 취업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사회인이 된다는 설레임이 가득했던 두 번째 방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사소한 일탈과 자유를 만끽하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축복과도 같은 젊음을 누린다. 친구들과 구석구석 멋진 관광지를 돌아보며 추억 만들기에 제주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30대의 제주는 직장에 대한 회의와 결혼에 대한 압박을 지니고 만났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도 될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도 될까라는 불안감과 초조함으로 제주를 만났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인생의 암흑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제주를 만났다.


40대의 제주는 남편과 함께 있다. 늦은 결혼과 연로하신 부모님의 돌봄과 치매 문제를 품고 제주를 만난다. 이런 고민을 품고 제주에 와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으니 감회가 새롭다.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닿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고, 생각지도 못한 치매 가족이 되어 제주에 왔다.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다 좋아질 것 같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삶의 명제들과 함께 또다시 제주에 와 있다. 10대의 나와 40대의 나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나인 것처럼, 내 기억의 제주와 지금의 제주도 달랐지만 그래도 제주였다.


생각해보면 늘 그 나이대에 맞는 걱정과 삶의 물음표를 품고 제주를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떠오르는 것은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수다, 다정했던 우정, 싱그럽고 풋풋했던 기억이 한가득이다. 아무 걱정 없는 시절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 그 때가 좋았다’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당연히 이제는 그 시절에 품었던 진로나 결혼 고민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섬 제주까지 와서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이 의아할 지경이다. 지금 내가 품고 있는 문제도 그 시절의 나처럼 누구나 겪는 삶의 관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돌봄과 간병 문제로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수많은 가족들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그렇게 다 잘 지나갈 거라고 나직하게 말을 건내 본다.


제주의 바다는 다정했고, 나는 새로워졌다. 제주의 속살은 부드러웠고, 제주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다음번 제주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품고 만날지 궁금해졌다. 제주는 늘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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