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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Mar 22. 2018

내가 이러려고 사진했나?

사진가가 되려는 자, 굴욕의 무게를 견뎌라 

“스튜디오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과 친구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며 무엇으로도 사진가라는 내 꿈을 이루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사진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다. 실장님의 몸과 마음을 지치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로 노력해왔는데, 이렇게 정반대의 결과가 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심지어 내가 스튜디오에서 태업을 했다고, 졸기만 했다고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어느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찮게 사진가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고 있는 졸업생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전시장 한 구석에서 주위 친구들에게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어시스턴트 생활이 너무 비참하다는 것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그 친구의 ‘어시스턴트 수난기’를 듣게 됐다. 

각색한 바가 없지 않아 있지만, 지난 몇 달 간 만난 사진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들은 거의 대부분 위와 같은 뉘앙스로 심경을 토로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에 겨워 어시스턴트 생활을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인격 모독, 노동력 착취, 말도 안 되게 적은 임금 등, 그 사연도 죄다 비슷했다. 사진가 어시스턴트야말로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그리고 ‘라면의 상식화’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시스턴트 부당 대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4년 ‘이상봉 열정페이’가 세간에 알려질 때만 하더라도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위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일말의 믿음이 있었다. 수습·인턴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에게 턱없이 낮은 임금을 주는 업체를 특별 감독할 것이라는 고용노동부의 발표도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언론이 계속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변한 게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어시스턴트 임금이다.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2016년 최저임금 6,030원을 기준으로 주 40시간을 일하면 최저 월급은 약 130만 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어시스턴트 월급은 쉬는 날도 거의 없이 매일 야근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30~50만 원으로 형성돼 있다. 처음 한두 달 월급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4대 보험도 먼 나라 얘기다(물론, 양심적인 사업장도 있다!).

어시스턴트, 말 그대로 조력자다. 사진가가 최선의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서 그를 도와주는 게 어시스턴트의 주된 역할이다. 스튜디오를 청소하고 정돈하는 것은 물론, 조명을 설치하고 후보정 작업을 하며, 잔심부름까지 도맡아 한다. 축구나 농구 경기에선 골을 넣기 전 마지막 패스, 즉 어시스트를 많이 기록한 선수에게 어시스턴트 상을 준다. 그런데 몇날 며칠을 고생한 어시스턴트에게 부상으로 돌아가는 건 ‘자괴감’과 ‘회의감’ 뿐이라니. 그럼에도 그들은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너 필드에서 나 안 만날 거야?

사진학과에 들어가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교수로부터, 선배로부터, 그리고 어떤 때는 나이 많은 동기로부터. “너 필드에서 나 안 만날 거야?”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들과의 관계는 굉장히 껄끄러워진다. 불합리함을 느끼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사진계’라는 곳이 워낙 좁다 보니 사진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학과를 졸업한 뒤 흔히 말하는 보통의 삶, 즉 기업에 취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전공부터가 말썽이다.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시대에 사진 전공자를 위한 취직자리가 다양할 리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업 공채 때 사진 전공이 서류전형에서 걸러지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다. 아주 드물게나마 기업 홍보팀에서 사진 전공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계약직에 취직하더라도 계약 연장의 꿈이 이뤄지는 것은 실제로 흔치 않다. 냉정하게 말해 사진 전공자의 업무능력과 경험이 타전공자에 비해 조금은 부족하다는 선입견 탓이다.  

몇 개 남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결국 가장 많은 선택을 받는 건 ‘상업 스튜디오 입사’다. 취업률 달성을 위해 학과로부터 스튜디오 어시스턴트 취직을 ‘강요’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기에 꼭 덧붙여지는 말이 있다. 바로 “처음에는 다 힘들게 일한다. 젊었을 때는 무엇보다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급여는 그 다음이다.”는 말이다. 학교에서부터 열정페이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난센스인 건 이러한 행태가 좁고 험한 사진계에서 전공자들이 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도제식 교육’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사진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정석 코스 중 하나는, 필드에서 이름 있는 사진가를 모시고(!)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일도 배우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어서다. 그래야만 추후에 사진가로부터 일을 받는다거나 작가 추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가의 평가와 추천이 업계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권력 관계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물 중 하나인 A씨가 있다. 필드에서 A씨 일화는 명성이 자자하다. 어시스턴트가 장비를 고장 냈다는 이유로, 식대를 과하게 지출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평소 월급보다 깎은 금액을, 그것도 모두 동전으로 지급했다는 이야기는 어시스턴트 사이에선 전설로 통한다. 다른 스튜디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업무량이 넘치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라 더 이상 특별한 것도 아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어시스턴트들도 있다. 어시스턴트 B씨는 “잦은 야근과 적은 임금에 대한 스트레스는 참을 만한데, 인격 모독은 도저히 참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 앞에서 “왜 이렇게 살이 쪘냐?”, “ 왜 화장을 안 하냐?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없는 거다.”라는 놀림을 받았을 땐 굉장히 수치스러웠다고 한다. 촬영 현장에서 울 수 없어 몰래 화장실에 가 울었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CASE 1>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일당백 노예라고 해야 할까. 밤늦게까지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것을 돕는 건 기본, 남아서 후보정까지 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 실장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시험 점수도 매겨야 했다. 틈틈이 시시콜콜한 잔심부름도 해야 했다. 시간 맞춰서 실장님의 아이를 데리러 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숙제도 봐줘야 했고, 가끔씩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현대판 집사가 있다면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느껴졌다. 


<CASE 2> 스튜디오 실장은 한국 스타일과 미국 스타일을 절묘하게 오가며 괴롭혔다. 그는 평소 “나는 미국에서 공부해 오픈마인드니 힘든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간혹 부당한 업무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바로 거친 욕설이 돌아왔다. 심지어 “여기는 한국이니까 내가 짜증을 내더라도 너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했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때 받은 굴욕은 잊을 수가 없다.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메뉴를 선택했더니, 그는 “네가 원하는 걸 정확히 모르니까 넌 사진도 못 찍는 거야.”라며 면박을 주었다. 그 이후로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 많아 

어시스턴트들은 일터에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사진가’라는 꿈을 좇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기약 없이 꿈만 생각하며 버티는 것은 생각외로 가혹하다. 현실은 냉정하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앞서 말했다시피 다수의 어시스턴트 월급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30~50만 원이다. 이 월급으로 서울 시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시원에 살면서 매일 라면만 먹기에도 빠듯한 금액이다.

상업 사진가가 안정 궤도에 오르면 직장인보다 훨씬 높은 수입을 올린다. 1년에 억대 수입을 올리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상업 사진 촬영 과정을 본다면, 어시스턴트의 조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피고용자인 어시스턴트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일 테다. 하지만 사진가에게 어시스턴트란 ‘소모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번에 만난 어시스턴트들은 “너 아니어도 일할 애들 많아. 나한테 사진을 배우니 월급이 많지 않은 건 당연하다.”는 말도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사진가의 수입이 좋아진다 해서 어시스턴트의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너무 인색해서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의 사례들도 많다. 어시스턴트들의 가장 큰 불만은 수입 대부분이 고용주를 위해 사용된다는 것. 함께 고생하는 자신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이 보장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게 그들의 바람이다. ‘임금’에 관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어시스턴트들도 만났다. “사회 초년병이라서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했거니와 이쪽 업계가 워낙 짜다고 하니까 으레 그런 줄만 알았다.”던 내용의 것이었다(case 5 & 6 참조). 하지만 관계자들에게 문의해본 결과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이와 함께 예체능 전공자들의 ‘열정페이’가 언론에 자주 언급되면서 어시스턴트 고용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요즘 업계 경향은 사진 전공자가 아닌 ‘지방에 거주하는 비전공자’를 고용하는 것. 이에 대해 (사진 전공)어시스턴트들은 사진계를 잘 모르는 지방 학생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은 이 스튜디오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일에 전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인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해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생각을 하면 덜컥 겁부터 나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스튜디오에 나가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일을 늘어나는데 임금은 그대로다. 참다 참다 한계가 오면 결국 그들은 스튜디오 퇴사를 결심한다. 하지만 사진가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인 어시스턴트를 고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해진다.


<CASE 3> 스튜디오 일을 하면서 개인작업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을 안 찍은 게 아니라 못 찍는 거였다. 매일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하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가 있겠나. 그럴 때마다 실장님은 몰아붙였다. “네가 간절하지 않아서다. 넌 사진 할 자세가 안 돼 있다.”고 말했다. 문득문득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ASE 4> 에이전시 소속 실장 밑에서 파트타임 어시스턴트로 몇 번 일한 적이 있다. 분명 처음에 약속한 임금이 있었는데, 막상 일이 끝나고 나니 딱 절반만 주겠다고 했다. 다음에도 일하기 싫으면 고소해서 나머지 돈을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쪽 관행이 그러니 그냥 넘어갈까도 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 고소장을 접수했고, 체불된 임금도 돌려받았다.



너희들이 겪는 거, 나도 예전에 똑같이 겪었어 

어시스턴트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일반 기업에서 주는 야근수당,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일을 시키려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주든지, 임금을 적게 줄 거면 최소한의 휴식은 보장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줬으면 한다.”고. 어시스턴트의 부당대우 문제가 개선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한 목소리로 “절대 안 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시스템을 바꿀 생각이 없고, 어시스턴트들도 소신 있게 말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몸을 사리게 된다.”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어시스턴트들은 “임금이 적더라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진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렇게 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하루를 버틴다고. 물론 그들을 고용하는 몇몇 사진가들은 “요즘 애들은 개념이 없다. 근성과 열정이 없어 한두 달  하면 힘들다고 일을 그만둔다. 그런 상황에서 고용·퇴직 신고를 자주 하는 것은 사업체에도 부담이 된다.”고 말한다. 소위 말하는 ‘요즘 애들’,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어 협업에 익숙지 않다’는 말도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딘다면 누구나 우왕좌왕하지 않는가.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시스턴트들이 개념이 없어서 사진가들이 그런 대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어시스턴트 대우를 제대로 안 해줘서 그들이 개념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건 ‘인식의 개선’이다. 비록 이것이 이런 문제에 늘 등장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공허한 외침’이지만 말이다. ‘나도 그랬으니 너희도 똑같이 겪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사람의 꿈을 담보 삼아 장난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고생하고 있는 어시스턴트들도 자신들이 사진가가 되었을 때 이런 악습을 뿌리 뽑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가져야 한다. 노동을 하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역시 당연히 마련돼야 할 것이다.

어시스턴트와 사진가들을 만나면서 자주 접한 말이 ‘불이익’이다. 그 ‘불이익’이란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모두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선뜻 말하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불현듯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가 떠올랐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의 횡포, 분명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불이익’이 무서워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 그리고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 한 마디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비선실세가 존재하는 것까지, 모두가 어시스턴트 부당대우 문제와 닮았다. 필드가 작은 대한민국처럼 느껴지는 것은 분명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견고할 것만 같았던 권력의 카르텔에도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꾸준한 참여 덕분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난 몇 십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어시스턴트 부당 대우’에도 가감 없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사진계의 부조리한 풍토, 쉽진 않겠지만 바뀔 때가 됐다. ‘모래알이 뭉친 바위가 파도를 이겨내는 모습’을 이곳에서도 보고 싶다.


<CASE 5> 어느 날 급여 통장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돈이 입금돼 있었다. 월급이 올랐나?하며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스튜디오 경리팀장이 내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입금된 돈 중 얼마의 돈을 현금을 돌려 달라.”고 말이다. 차액을 돌려주니 결국엔 원래 받던 임금만이 통장에 남아있었다. 그땐 사회 초년생이라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CASE 6> 어느 날 실장으로부터 “은행에 가서 네 명의로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 오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을 쓰면 법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돈이 있어 곤란하니, 자신에게 통장을 건네주면 알아서 입출금 처리를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쪽 업계에선 통상적이라는 말도 했다. 실제로 나와 상관없이 은행 거래가 이뤄진 셈이다. 통장만 봐선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모든 거래가 내 이름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의아했지만 괜히 불편해질 것 같아서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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