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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May 07. 2018

낯선 파주에서의 하루

정영돈


파주; 파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흩뿌리는 안개비로 기억되는 도시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파주(坡州)였다. 파주를 방문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얼마 안 되지만, 희한하게 그곳에 갈 때는 항상 안개와 비가 함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과 제법 가까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음에도 의외로 고요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처럼 기억 속에 파주(把住, 마음속에 잘 간직하다)된 파주는 스산함이 감도는 도시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이 고정관념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영돈 작가가 파주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고 난 후부터다. 그의 신작 <의아한 산책(Wondering Wandering)>은 작가가 파주를 걸어 다니면서 마주한 모습들을 담아낸 사진들이다. 작업의 시작은 작가의 군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년 병장 휴가 때 집이 있는 파주로 향하던 정영돈은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집으로 갈 때마다 즐겨 타던 버스의 번호가 군대에 있는 동안 전혀 다른 번호로 바뀐 것이다. 며칠 사이에 그는 또 다른 생경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재개발이 한창이던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낯선 풍경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작가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집 주변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파주의 기억을 걷다

나무가 잘리고 산이 깎이고 도로가 생기는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 재개발사업이 끝나면 소위 랜드마크라고 불리는 격조 높고 화려한 건축물이 생겨난다. 정영돈 작가의 작업 역시 이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를 기반으로 촬영했지만, 그가 포착한 파주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곳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지를 채집하기 위해 정영돈은 자동차나 지하철이 아닌 자전거를 이용하여 천천히 파주 일대를 돌아다녔다. 행여 달리는 교통수단 안에서 밖을 바라보다 사소한 풍경 하나라도 놓칠까봐 염려돼서다. 공터에서 비박을 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여행을 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채집했다. 재개발로 파헤쳐진 땅, 모래더미에서 자라난 풀, 마치 달걀을 낳는 듯 보이는 연통 등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시선이 파주의 사물들에 투영됐다. 촬영 후에는 파주 시민들을 만나 사진을 찍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고 나서는 현상한 사진과 함께 일일이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 각자가 생각하는 파주에 대해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청사진이 깨진 것은 일순간이었다. 직접 만났을 때는 작업에 우호적이던 시민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50명에게 보낸 편지 중 답장은 달랑 세 장 뿐이었다. 이렇게 귀한 자료들과 정영돈의 사진이 모여 <의아한 산책> 시리즈가 탄생되었다.

일상의 오브제와 주변의 사람들

정영돈의 신작은 일종의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보인다. 파주라는 큰 틀 아래 서로 독립적이면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엮여 있는 탓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의아한 산책>은 마지막과 첫 번째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첫 번째 이야기를 구성하는 마지막 컷의 작은 부분 하나가 두 번째 이야기의 모티프가 되고, 마지막 이야기의 최종 컷 일부가 첫 번째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형식이다. 그러다보니 지도 위에 미리 코스를 정해 놓고 이를 따라 반복해서 걷는 느낌이 든다. 현실에선 똑같은 거리를 계속 걷다보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만, 정영돈의 신작은 다르다. 처음 보는 낯선 파주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한 내가 봤던 파주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니 작업 주변을 자꾸만 산책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신작은 관람객들이 사진을 보며 새로운 사실을 만나게 되는 작업인 동시에 사진 속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작업이다. 일종의 참여형 작업으로 정영돈과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파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엮은 것이 <의아한 산책>이다. 정영돈은 그가 바라보는 파주를 관람객에게 관철시키지 않기 위해  사진에 그 어떤 연출도 하지 않았다. 일상의 오브제들을 그대로 사진에 담았고, 주변 풍경과의 이질감을 주지 않기 위해 이들을 극도로 클로즈업 하는 것도 삼갔다. 인물들의 포즈 역시 평범한데, 이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미장센들이 정영돈에게는 꽤나 중압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 예로, 정물사진 사이에선 이들을 잇는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만, 인물사진에선 어렵다. 인물이 가진 스토리가 단번에 파악되지 않도록 사진을 구성한 까닭이다. 그러나 인물사진이 정물사진 사이사이에 배치될 경우 사전 정보가 없는 관람객들은 혼란스러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인물사진이 일종의 유형학 분위기를 띠는, 많은 정보가 배제된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진을 개별적으로 배치한다면 과정을 중요시 하는 작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작업의 배치와 디스플레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영돈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이미 이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발견한 것 같다. 현재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곧 전시장에서 새로운 파주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비밀에 부쳐져 어떻게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새로운 파주 이야기는 그의 개인전(1.26~3.9, 송은아트큐브)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2016.01]




정영돈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순수사진전공 재학 중이다. 2014년 토탈 미술관에서 <환기; 환기>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단체전은 2012년 <미디어 프로젝트: 언바운드 아카이브>를 시작으로 20여회 참여했다. 개인작업 외에 형제들과 함께 ‘무진형제’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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