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현
이나현의 작업은 사진인 듯하지만, 전통적 의미의 사진은 아니다. 카메라와 필름이 아닌, 렌더링 프로그램 안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진 아니잖아.”라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사진-)이미지’ 너머에 있는 ‘본다는 것’을 생각하게끔 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18년 <미래작가상>을 수상한 이나현에게 뜬금없이 꿈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은 ‘발명가’였다. 당시 뚱딴지같은 이나현 말에 생뚱맞은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얼마 전 ‘온수공간’에서 열린 전시 <아이엠그라운드>에서 그는 그때의 말이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음을 증명해냈다.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에서 보이는 변주를 쫓아 사진적 시각의 근본을 확인하고, 기술 발전과 함께 이미지의 활용이 급변하는 현 상황에서 (사진-)이미지가 인식되는 방향을 고민’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전시에서 이나현이 선보인 건 우리의 눈을 홀리는 기묘한 사진이었다.
문득,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사진(寫眞)의 정의를 끄집어내야 한다. 사전적으로 사진에는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과 ‘물체를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 냄. 또는 그렇게 그려 낸 형상’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전자는 전통적 범주의 사진을, 후자는 포괄적 의미의 사진을 지칭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나현이 구축한 ‘I make: wayfinding’이라는 함수 위에 사진의 사전적 정의를 대입하면, 종속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 상투적인 문구로 부연하자면, 전시에 공개한 작업 <I make: wayfinding> 속 사진의 정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카메라와 필름이 아닌, 가상공간이라는 실체 없는 세상에서 탄생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때(전통)의 물리적 한계를 넘은, 지금과 미래를 잇는 타임라인 사이에 있는 사진인 셈이다.
전시를 포괄하는 기획자의 목소리겠지만, <아이엠그라운드>가 내세운 ‘(사진-)이미지’만큼 이나현 작업을 잘 대변하는 것도 없어 보인다. 사실 처음엔 ‘사진’과 ‘이미지’를 나란히 배치해놓은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인 이미지는 상위 개념으로, 이를 실물로 구체화한 사진은 하위 개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지란 개인의 머릿속에 그린 주관적인 그림”이라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무엇인가를 가슴속에 그린다. 그렇기에 심상을 기계적인 형상으로 완벽히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사진과 이미지 사이에 어느 정도 틈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투사체와 피사체
그런데 이나현은 ‘(사진-)이미지’를 발명해냈다. ‘사진’ 관점에서 작업은 물체의 형상을 그려냈다. 다만, 카메라와 필름이라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디지털 가내수공업을 택했다. 렌더링 프로그램 안에서 기본 도형을 변형했고, 면과 면을 이어 붙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으며, 굴절률이 반영된 유리 조각도 제작했다. 심지어 조물주인 양 빛까지 그려 넣었다. 작업 배경과 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뜯어보지 않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직접 찍고 프린트한 사진’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편, ‘이미지’ 관점에서 이나현 작업은 설명 없이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작가의 유별난 생각과 예민한 손끝 감각에 기대고 있다. 각각 1/4씩 절단한 네 개의 구를 모았을 때 가운데 부분이 2차원 사각형으로 보이는 시신경의 착각, 메모리카드 단자에서 읽힌 얽혀 있는 네트워크망, 유리에서 파생된 물성이 없는 피사체가 액정 디스플레이를 넘나드는 상상 등이 모티브가 됐다. 어떤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감정과 인식 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종합하자면, 보는 이는 작가의 관념(공상적, 추상적)이 투영된, 잘 빚은 사진 한 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I make: wayfinding>은 사진의 기록성을 과거의 구태의연한 틀로 받아들이는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대상(사물, 상황 등)을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어떤 개념이나 사회적 이슈를 도출하기보다는, 사물을 차갑게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굴절 적응’과 ‘행위자-네트워크’로 연결되는데, 사진가는 무미건조하게 사진을 찍을 뿐(혹은 만들 뿐), 대상의 기능과 형태, 의미는 수용자 사이에서 재정의됨을 말한다. 작업과 마주하니, 회전하는 듯한 현상 탱크에선 화학작용이 연상되고, ‘클라인의 병’을 불러일으키는 끝없이 이어지는 파이프에선 조세희의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일상에서 ‘사실’은 우리의 눈을 거쳐 ‘진실’이 된다. 물론, 모든 사실이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진가의 개입 탓에 사진이 현실의 증거를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이나현의 ‘(사진-)이미지’는 ‘목격자로서의 눈’을 의심하게끔 한다. 보고 있는 것이 실재인지 허상인지,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만든다. 또한,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의 성격도 따져보게 된다. 우리는 디지털 기기로 보는 사진엔 ‘조작’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면서, 정작 이를 프린트한 것은 조작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전자 기계로 찍고 보던 것이 종이 위에 안착하였다는 이유로 신빙성이 높아지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투사체가 피사체로 전환되면, 허구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이 지점에 이나현의 ‘(사진-)이미지’가 있다. 그는 작업에서 대상의 의미만 지연시키지,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눈을 홀리는 사진을 제시하며, ‘사물-사진-언어’로 이어지는 견고한 공식을 깨보라고 권유할 뿐이다. 디지털을 토대로 하는 ‘사진을 본다.’라는 행위의 지금과 미래를 숙고하기엔 제격이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사진 개념과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다. 혹자는 여전히 전통적인 사진만이 객관적이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사진조차 진실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역시 박제된 과거의 시간을 유영하는 것도 좋지만, 점점 달라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시선도 알아챌 필요가 있다는 일종의 권유다. 앞에서 설명한 작업의 모티브를 웨이파인딩(Wayfinding)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이해와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0. 01]
이나현 웹과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을 기반으로 기술과 기록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 사물과 언어의 관계성을 토대로 본다는 것의 허구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으며, 2018년 <미래작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