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근
지난 7년간 ‘아리랑예술단’ 단원들의 삶의 궤적을 기록한 이동근의 개인전 <아리랑예술단: 유랑극장>이 오는 12월 31일까지 일우스페이스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남한 공동체로 편입되지 못한 탈북예술인들의 타자성에 눈을 돌려 이들이 거쳐 온 여정과 함께, 중국과 북한의 경계인 두만강 유역의 장소성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웃고 있나요?
곡예, 연극, 판소리 등을 업으로 하는 예술인을 가리켜 ‘광대’라 부른다. 어떤 노랫말처럼, 광대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웃음 파는 일을 한다. 슬퍼도 웃으며 자신의 모습을 애써 감추는 것이 광대의 철칙이다. 흔히 우리는 광대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웃음 뒤에 진한 페이소스(Pathos, 동정, 슬픔, 연민 등)가 있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동근은 지난 7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아리랑예술단’을 기록했다. 아리랑예술단은 북한에서부터 활동하던 전문예술인과 이들로부터 배운 일반 탈북민으로 구성된 ‘북한예술 전문 공연단’이다. 1990년대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기근과 폭정으로 북한을 탈출한 후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약 3만 3천 명인데, 그중 70~80명이 공연을 하고 있단다. 이들은 지역 축제와 통일 관련 행사를 돌아다니며 북한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아리랑예술단은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북한에 대한 향수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통일에 대한 낭만적인 감정을 조성한다. 그러나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이들의 삶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어렸을 때부터 세뇌된 체제와는 정반대인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활동도 어렵고, 남한 공동체에 편입되기도 어렵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살기 위해 지긋지긋했던 북한의 삶을 무대 위에서 재연하는 셈이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야말로 광대의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웃음 뒤 진한 페이소스’는 이동근의 초상사진에서도 감지된다. 그들의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저마다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은 슬픈 눈이 이를 대변한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북한을 탈출하다가 강에서 실종된 이야기, 브로커에 속아 중국에 팔려 간 이야기…. 참으로 기구하고 애잔하기 그지없는 운명이다. 공연단 초상사진 외에도 이동근은 아리랑예술단의 공연 모습과 무대 뒷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고, 대다수 탈북민이 넘어오는 두만강 근처 풍경을 촬영했다.
고저 어마이 아버재 앞에서 헴없이(철없이)
춤추고 노래하던 그 기억이 내 마음을 마스워요(부숴요).
별을 이고 나갔다가 별을 이고 들어오는 길.
새로운 어둠을 꼭대기에 걸친 수양버들의 머리칼 아래에서.
이 어둠이 내 어둠이에요. 이 밤이 내 밤이에요.
삶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
유랑극장’이라는 제목처럼, ‘아리랑예술단’은 전국을 누비며 공연한다. 전시가 진행 중인 일우스페이스 역시 유랑 성격이 짙다. 실제 예술단과 다른 점이 있다면, 관객이 전시장을 유랑하며 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우리를 맞이하는 건 공연단의 초상사진이다(갤러리A). 배우들 사진이 설치된 뮤지컬 극장 로비가 떠오르는 첫인상이다. 무대의 막 같은 목란꽃(모란꽃의 북한어) 색의 벽을 지나면, 양쪽으로 두만강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예술단의 일상과 공연 모습을 기록한 90점의 사진이 자리 잡고 있다. 두만강의 황량한 겨울 풍경과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단원들의 묘한 대비가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천막을 스크린으로 사용하는, 이동 극장을 연상케 하는 바로 옆 공간(갤러리B)에선 북한가요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와 함께 무대 안팎의 모습을 담은 영상작업을 볼 수 있다.
이동근 작업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통해 ‘같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중 <아리랑예술단>은 오랜 시간 ‘외국인 주부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가르친 경험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자연스럽게 라포(rapport)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과시적인 공연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예술정치를 은유하고, 단원들이 노래하는 자유로움과 희망의 목소리’를 담은 <아리랑예술단>이 차용한 개념은 ‘극장국가’다. 이는 물리적 강제가 아닌 과시의 정치(화려한 의례와 공연)로 통치되는 국가를 뜻한다. 하지만 작업은 극장국가 북한을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체제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북한 문화예술을 명확히 보여주지도 않는다. 얼핏 개념을 화려한 이미지에 녹여 전면에 내세운 ‘극장 사진작업’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되레 ‘유랑’이 이동근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 소비 대상으로 전환된 정치 이데올로기 등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로 인해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부유하는 정체성이 형성된 것 같다. 모호한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다.
히토 슈타이얼은 “삶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삶 자체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타자가 된다. 그것은 진짜이면서도 섬뜩하고, 원본이면서도 복제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스스로의 도플갱어다.”라고 말한다. 진짜가 가짜로, 또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혼란의 시뮬라크르 세상이다. 이동근의 <아리랑예술단>을 보면서, 우리의 시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정치적인 것을 소비하는 우리의 시선이 이도 저도 아닌, 진짜이지만 결코 진짜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리랑예술단’을 떠나 북한의 이미지 정치를 대하는 작금의 상황도 사실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201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