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주현
‘원더키디’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 시대로 전치하는 게 허우룩하겠지만, 2020년에 사는 류주현의 <Plain Plane>을 보고 있으니, 1857년 등장한 오스카 레일랜더의 <인생의 갈림길>이 오버랩된다. 먼저, 작업 외적으로 둘을 살펴보자. 1850년대 사진은 ‘기록성’과 ‘사실성’이라는 매체적 특성은 인정받았으나, ‘예술성’에는 물음표가 붙어있었다. 재현 행위가 기계에 의해 이뤄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사진에 새겨진 선입견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인생의 갈림길>이 회화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픽토리얼리즘’은 사진이 예술 관점에서 논의되는 걸 가능케 했다. <Plain Plane>도 비슷하다. 실재하는 대상을 기록했으면서 동시에 굉장히 회화적이다. 프린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사진인지 프로타주인지 헷갈리기에 십상이다. 한편, 작업 내적으로 두 작가는 ‘탈경계’를 공유한다. 탈경계란 ‘어떤 분야와 다른 분야를 가르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으로 탈경계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현상/행위 등으로 설명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상호교섭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관련, <인생의 갈림길>은 ‘근면, 종교’와 ‘쾌락, 향락’의 비교·대조가 인간 정신에 영향을 줬다고 평가되며, <Plain Plane>은 기술(암실)과 과학(물리학)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선택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고민은 대부분 ‘이상이냐 현실이냐’로 귀결한다. 결정의 순간, <매트릭스>의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파란 알약은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에, 빨간 알약은 ‘진실의 방’에 다다르게 한다고. 마찬가지로 <Plain Plane>도 감상과 해석의 갈림길 앞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보이는 대로 접근할 것이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추적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장고 끝에 내린 선택은 두 알약을 차례대로 삼켜보는 것. 일단, 파란 알약이 체내에 흡수되면, <Plain Plane>은 어느 순간 ‘암실 세계’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던 입자가 암실 행위자(작가)에 의해 광명을 얻은 느낌이다. 비록 추상적인 형태지만, 네거티브/포지티브 관계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 빛을 받은 인화지 위로 상(像)이 새겨지는 모습, 솔라리제이션으로 탄생한 것 같은 뿌연 풍경 등이 이를 대변한다. 더욱이 작업은 회화적이다. 1850년대라면 분명 ‘예술성’이 언급됐을 터.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여기에선 ‘재현’에 구미가 당긴다. 대상과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는 <Plain Plane>의 추상적인 사진에서 재현과 멀어지려 추상을 선택했던 회화가 떠올라서다. 또한, 사진은 앨빈 랭던 코번에서 시작된 ‘구체사진(Concrete Photography)’ 같이 무언가의 지표가 아닌, 지각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도 읽힌다. 이들을 추론하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순수하고 구체적이라는, 다시 말해 추상은 실재에 가까워지려는 행위란 결론에 도달한다. 궁극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대상 앞에 선 관객은 보이는 것과 다른 ‘재현의 의미’를 도출해야 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도 철저히 보는 이의 몫이었다.
이제 빨간 알약을 삼킬 시간이다. <Plain Plane>이 물리학 궤도에 있다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단순히 이미지만 보더라도 입자의 궤적, 토머스 영의 ‘이중슬릿(빛의 파동성을 보여주는 간섭 효과 발견)’이 생각나지 않는가. 여기서 잠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 머리카락 등에 공기를 반 정도 섞어 촬영한 예전 작업 <몸의 부스러기>(2017)를 참고해보려 한다. <몸의 부스러기>에서 류주현은 쓸모와 의미를 다 한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쓸모와 의미가 지워지며 생겨난 공백을,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우고 있는 공기에 집중했다. 말인즉슨, 곧 떠나갈/사라질 것을 짧게나마 붙잡아둘 수 있는 공기를 시각화했다는 뜻이다. 원점으로 돌아와, <Plain Plane> 기저에도 공기가 있다.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무언가의 표면을 담아냈다. 마치 공기라는 물질과 맞닿으면서 생긴 생채기를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인화지 위에 안착한 그러나 무엇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형태는, 작가 표현을 빌리면, ‘본래의 성질을 지우고 물질적 증거로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들’이다. 류주현이 이런 흔적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미시적 존재의 일생을 더듬어 가면서부터다. 어느 날,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것들의 움직임이 궁금해 물리학 책을 펼친 그는 텍스트를 보조하기 위해 사용된 도판이 추상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추측건대 즉각적인 깨달음 대신, 사유에 빠지게 된 상황이 마뜩했으리라. 어쩌면 텍스트와 도판 모두 ‘자국’으로만 감지됐을지도 모른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미세한 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건 섭리 중의 섭리다. 이를 일상에 대입하면, ‘인간과 자연이 나뉜 듯하나, 사실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고, 하릴없이 서로 부대끼며 살고 있음’으로 이어질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점으로 이뤄진 물질적 증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늬(표시)가 없는 (평평한) 면’을 가리키는 제목 ‘Plain Plane’에선 작가가 3차원 대상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요소들을 과감히 절단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암실 작업과 물리실험에서 특정 결과를 끌어내기까지 대상 본질에 간여하는 행위를 지양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형국이다. <Plain Plane>은 알고 나면 ‘풋’하고 웃음이 나오는 피사체(는 비밀로 하려 한다!)를 스트레이트하게 찍은 다음,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후가공한 작업이다. 흥미로운 점은 감상과 해석 과정에서 ‘이중트릭’이 작동한다는 것. 무언가 눈에 들어오나 명징하지 않은 게 첫 번째 트릭이요, 무엇을 찍었는지 알았음에도 의식은 다른 곳으로 향해간다는 게 두 번째 트릭이다. 김춘수 시에 빗대자면, 꽃에서 치환된 ‘몸짓’을 다시 ‘꽃’으로 돌려놓지 않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문득,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이 있다. 절대 엮이지 않을 듯한 재현의 ‘의미’와 물질적 ‘증거’의 교섭/간섭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비약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지극히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 ‘상보성’이다. 이는 원자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 것처럼, <Plain Plane>을 구성하는 사진이 곧 의미이자 증거임을 뜻한다. 연장선에서 앞서 언급한 ‘미세한 점들의 집합체’를 소환해본다.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도 이것이 되는 상황에서 과연 본질은 무엇인지’를 묻기 위해서다. 원론적으로는 ‘우리는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니 절대 현혹되지 말지어다.’라고 할 테지만, 사실 <Plain Plane>에서 진짜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작업은 대상 원형에 관한 힌트조차 주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무상(無相)과 무지(無知)의 매력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도 보는 이에게 추가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무언가 존재했음을 지칭하는 ‘증거’와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의 개념까지 인식하는 것. 이럴 경우, <Plain Plane> 종국엔 현실과 이상이 혼재하는 보랏빛 시공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마 그곳은 너와 나 사이에 대립과 차별이 없는 중용의 공간이 아닐지 싶다. 감각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뭐든 간에 말이다. [2020.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