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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4. 2020

기억에 묻다

메모리플랜트

‘메모리플랜트’는 바쁜 삶에 치여 시간 저편으로 흘러가 버린 기억을 붙잡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그들에게 들어보는 기억의 가치.


왼쪽부터 이원영, 김수진, 염지혜, 전미정, 박소진









서울 필운동 ‘배화학교’의 흔적과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 중 이것만큼은 보듬고 보듬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을 때가 왕왕 있다. 가령, 달콤하고 짜릿했던 첫사랑의 감정이라든지, 잊지 못할 인연과의 추억 같은. 그런데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막막한 게 사실이다. 기억의 양도 많은데다가, 순서까지 뒤죽박죽이라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우리의 지나간 시간을 아름다운 영원으로 남게 해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전미정 & 박소진 공동대표, 이원영 & 염지혜 팀장, 김수진 매니저로 구성된 ‘메모리플랜트’는 ‘아카이브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삶의 기억이 잘 전달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그 방향을 기획·제안’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이들이 첫발을 내디딘 건 2011년이다. ‘사진아카이브연구소(이경민 소장)’에서 활동하며 아카이브를 알게 된 전미정과 故 육영혜(전 포토넷 편집장) 대표가 가치 있는 기록물을 후세에 전달하고자 설립했다. 처음엔 1년 프로젝트에 가까웠으나, 갑작스레 육 대표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을 같이했던 동료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본디 이름은 ‘기억발전소’지만, 얼마 전 10주년을 맞아 ‘메모리플랜트’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거듭났다. 여기에는 ‘기억을 발전시키는 것’과 ‘기억의 가치를 널리 확산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Factory가 아닌, Plant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무언가를 찍어내는데 집중하는 공장 개념 대신, 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을 원했기 때문이다. 현재 ‘메모리플랜트’는 2012년부터 합류한 박소진이 전미정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개인·기업·지역의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정리하여, 미래에도 기억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의 결과물은 영상, 전시, 출판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기억, 기록을 아카이브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로 풀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언젠가 ‘엄마에 관한 기억을 정리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의견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때마침 힘겨운 세월을 긍정적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을 자주 만났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미스 할머니>(2016) 전시가 탄생했다. 역사의 산증인인 할머니가 각 가정에 한 명씩 있다는 것에 착안, 할머니 다섯 분의 기록을 정리해 전시를 구성했다. 누구나 엄마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런지, 공감하고 눈물 흘리는 관객이 많았다. 특히, 홀로 전시장에 오신 80대 할아버지가 “우리는 이렇게 살았고, 내 엄마는 이랬어.”라고 말해줬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비록 타인의 기억이지만, 이를 보며 자신의 기억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 김수진 ] 첫 프로젝트였던 ‘서울식물원 프로젝트’가 생각난다. 서울식물원이 있는 마곡에서 5대째 사는 분을 인터뷰하면서 마곡의 역사와 이제는 사라진 공간, 동네,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지나왔던 시간을 촘촘히 기억하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장 어제 일도 까마득하게 기억하는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니까. 더욱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음에도, 동네에서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항상 현재만 살려고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과거를 오래 기억한다면, 지금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더 풍족하고 커 보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일하면서 느낀 ‘기억의 힘’이 있다면?

[ 염지혜 ] 함께 했던 기억을 혼자만의 것으로 두지 않고, 사람들과 공유할 때 ‘기억의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기억의 공유가 중요한지 몰랐는데, 결혼 후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나니 기억이 더 소중해지더라. 특히, 아이를 낳은 뒤 부모님과 ‘어렸을 적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계가 더욱 견고해짐을 느꼈다.


[ 이원영 ] ‘메모리플랜트’ 일원으로는 ‘기억은 누군가를 슬프게 혹은 행복하게 만드는구나!’, ‘자신감을 상승시키거나 떨어트리는구나!’, ‘그런데도 누군가는 기억을 통해 살아가는구나!’ 등을 느낀다. 반면, 기억을 바라보는 사람으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의뢰인을 지켜봐서 그런지 그 기억 속에서 흥미를 찾는 것 같다. 간혹 내가 이래도 되는지 고민할 때가 있다. 숨겨놓았던 상처를 말해줬을 때,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것에서 쾌감을 느꼈을 때, ‘내가 저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나?’를 생각하게 되더라.


‘메모리플랜트’의 처음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초기엔 ‘아카이브’라는 말이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할 때마다 의뢰인에게 ‘아카이브’ 뜻을 설명해야만 했다. 다만, 아카이브의 사전적 의미(정보를 기록, 보존해놓기 위해 파일을 모아놓은 것)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오래된 것, 이내 사라질 것을 정리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워크숍과 전시, 출판 같은 다양한 활동을 실현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아카이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아카이브를 활용한 활동’으로 출발해 스스로 무언가를 수집하고 연결하는 ‘행위로서의 아카이브’로 이어진 듯하다. 수동적 행위에서 능동적 행위로 달라졌다고나 할까. 아마 지금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따로 있을 것이다. 경험치가 쌓인 만큼, 생각도 성숙해졌을 테니까.


(왼쪽) 학창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졸업생 / (오른쪽) 전시장 내부 모습 © 메모리플랜트
배화기념관 건립전 ‘꽃이 온다’ _ 배화 120주년을 맞이해 설립된 배화기념관. 선교사 사택, 미군 주둔지로 사용되던 건물이  1971년 배화의 생활관, 배화 동창회관 등을 거쳐 배화 동문의 기억과 배화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이 되었다.  (본 건물은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 제673호로 지정되었다.)


‘기억과 기록을 다루는 행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 전미정 ] 초기에는 다문화, 여성 문제, 국가 폭력의 희생자 등 세상을 바꾸는 일에 집중했다. 이후에는 배제된 기억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역사는 유명인 중심으로 기록되지 않던가. 하지만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기억, 사진, 아카이브 모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 중심으로 구축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 이원영 ] 처음엔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뒀다. ‘기억은 시간이 흘러 재해석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프로젝트 진행이 어렵다. 지금은 틀렸다고 하는 것이 언젠가 바뀔 수 있는, 마치 ‘열린 결말’처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억과 기록을 같이 찾아가거나,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 박소진 ] 기억(기록) 작업은 10~20년 뒤 열린 결말을 보완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연구를 발표하면 온전히 내 논리가 되는 학술 작업과 결이 다르다. ‘이러한 집단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해석될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건 학자 몫이다. ‘메모리플랜트’ 역할은 사람이 기억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설령 그 사람의 기억이 틀렸더라도 ‘기억의 힘’을 갖게 하는 것이다.


기억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일의 전반적인 과정이 궁금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기리기 위해 사진집 제작을 했던 남성분과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보려 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내용을 담고 싶은지를 정리한 후, 이를 편집하는 순으로 진행했다. 가슴 아픈 일을 본인이 정리하다 보면,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가 있는데, 이때는 ‘추측’을 통해 편집하기도 한다. 기억을 다듬어 기록을 잘 남기고 싶은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돌아가신 분 관련 작업은 사회공원 차원에서 진행한다. 의뢰인은 사랑했던 사람을 혼자 기억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기억을 나누고 싶어서 작업을 원한다. 출판까지 3년이나 걸린 책도 있었다. 기록을 모아 기억을 정리하는 게 힘들어서다.


기억에 관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기억에 관여한다기보다, ‘해석’에 관여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메모리플랜트’를 찾아오는 의뢰인은 자신의 기억을 증명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끌어내고, 끄집어냄을 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다. 한 번은 자신은 부정적인 기억밖에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딸 사진을 보고 환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딸 사진 보며 행복해하시네요?”라고 했더니, “제가 불행하게 살고 있진 않았군요.”라는 말을 하더라.


(왼쪽) 과거 성매매집결지 내 업소 / (오른쪽) 전시장 내부 모습 © 메모리플랜트
전주 선미촌아카이브전시관 ‘여성 인권 기록과 기억 _ 성매매집결지로 사용되던 공간이 선미촌 역사를 담은 아카이브전시관이 되었다. 성매매집결지와 선미촌의 100년 역사를 살펴보고, 선미촌의 변화를 만들어온 활동을 전시관에 담았다. 여성 당사자와 활동가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아카이브 콘텐츠를 제작했다.


모두가 아키비스트인 시대다. ‘메모리플랜트’만의 차별성은?

본질을 찾는 것. 언젠가 “우리가 사라지는 게 좋은 일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각자 알아서 아카이빙 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현상이니까. ‘모두가 아키비스트인 세상’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한다면, 어떤 단어가 남발될 때는 본질과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치 사랑이 부족한 시대,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작정 수집하는 것이 아닌, 기억과 기록의 본질을 꿰뚫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리만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웹 기반 플랫폼이 점점 활성화될 텐데, 지면을 넘어서는 아카이브 플랫폼도 기획 중인가?

‘평창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자원봉사자들의 기억과 기록’을 기반으로 하는 웹 전시를 연 적이 있다. 백서 대신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책으로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청이 많았다. 한때 미국에서 개인사를 온라인으로 정리하는 게 트렌드였는데,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SNS가 존재하는데,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웹 기반 플랫폼을 쉽게 시작할 수 있겠나. 무작정 실행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변주할 생각이다. 가령, 교육 목적 아카이브는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도록 온라인으로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일 테다.


마지막으로, ‘메모리플랜트’ 구성원은 본인의 기억을 어떻게 관리하나?

[ 염지혜 ] 기록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모았던 편지를 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출산 후 달라졌다. 아이 사진을 찍어 종종 SNS에 올리고 있다. 그런데 엄마들이 왜 앨범을 모으는지 알겠더라. 아무리 디지털로 저장해도 잘 안 보게 된다. 게다가 SNS에선 과거 사진을 찾는 일이 너무 번거롭다.


[ 김수진 ] SNS에 기록한다. 그런데 가상공간에 저장하다 보니, 기억이 흩어져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조만간 기억을 모아서 정리해보려 한다.


[ 이원영 ] 집에 다이어리와 영화 팸플릿이 수두룩하다. 자주 찾아보지도 않을 것을 왜 기록했는지도 모르겠고, 또 기록을 봐도 뭘 썼는지도 모르겠더라.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육체적인 것 말고, 정신적인 성장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과거 이야기를 통해 나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박소진 ] 찍은 사진을 하드디스크에 연도별로 정리한다. 엄마, 동생, 남편 관찰기만큼은 꼭 정리하고 싶다. 관계에서 오는 변화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느끼니까.


[ 전미정 ] SNS에 올린 사진이 과연 기억인지 의문이 든다. ‘진짜 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내 휘발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SNS는 잘 설정된 나를 보여주는 창구니까. 일기를 오래 써왔는데, 얼마 전 다이어리를 한 뭉치 버렸다. 지금은 되레 막 버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잘 잊어야, 좋은 기억이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닐까. 요즘 들어 농담 삼아 다음에는 ‘망각발전소’를 만들어보자고 말하기도 한다.

[202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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