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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4. 2020

4대의 기록

임석제, 임인식, 임정의, 임준영

임석제, 임인식, 임정의 그리고 임준영. 4대에 걸쳐 우리나라를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집안이다. 아버지 임정의와 그의 아들 임준영에게 들어보는 그때 그리고 지금.



노동 계급에 주목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임석제(1918~1994), 국가 주요 행사와 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록하고, 한국전쟁 종군 사진가로 참여했던 임인식(1920~1998), 그리고 우리나라 1세대 건축 사진가 임정의(1944~)와 그의 아들 임준영(1976~). 사진사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사진가 집안이다. 건축과 상업, 개인 작업을 동시에 진행 중인 임준영(4대째)을 기준으로, 임석제는 증조할아버지요, 임인식은 할아버지다.


먼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석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임응식을 소환해야 한다. 임응식으로 대표되는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시대상·사회상을 보여주는데 방점이 찍혀있는 사진이다. 그의 사진에선 궁핍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표정이 종종 발견되는 게 특징이다. 임석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시 시대상·사회상을 반영하지만, 임응식과는 달리 활기차고 역동적인 노동자 계층을 주 대상으로 한다.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이론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명확하게 구축되지는 못했다. 정전협정 이후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형식이 자취를 감춘 것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임석제와 임응식의 사진 모두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시대의 기록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단편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두 작업 모두 그때의 풍경을 온전히 반영했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때’의 삶을 엿보는 이상적인 방법은 두 사진가의 작업을 균형적으로 보는 것일 테다.


임인식 사진의 결은 임석제와 조금 다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한국전쟁을 기록했던 그의 이력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제주 4.3 사건 등도 카메라에 담았다. 전역 후 1952년에는 ‘대한 사진 통신사’를, 1959년에는 ‘신한관광사’를 설립해 정부와 육군, 언론사에서 필요한 사진을 촬영·제공했다. 한편, 임인식의 아들 임정의는 건축 전문 사진가다. ‘사진 기자’였지만, 건축가 김수근과 만나면서 건축사 진가로서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의 아들 임준영도 건축 사진을 찍는다. 임준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건축 사진에 물의 흐름을 입혀 분주한 도시의 풍경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종합하자면, 4대가 찍은 사진을 통해 우리는 100여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왼쪽) 즐거운 한때, 1955 / (오른쪽) 포목 건조 1955
(왼쪽) 농부의 아침 / (오른쪽) 제주 서귀포, 1960
임석제(1918-1994)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사진가다. 노동 계급에 주목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활기차고 역동적인 노동자 계층을 주 대상으로 한다.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임석제, 임인식, 임정의, 임준영 모두 ‘기록’에 초점을 맞춘 사진을 선보였다.

[ 임정의 ] 우리 가족은 해방 전인 1944년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용산 부근에 ‘한미사진기점’을 개업했던 아버지(임인식)는 서울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을 촬영한 뒤 손수 집에서 현상·인화를 했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종군 사진가로 수많은 기록을 남겼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52년에는 ‘대한 사진 통신사’를 설립, 국가 주요 행사와 전국 문화 관광지 등을 촬영했다. 한편,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사동에 사진 화랑도 오픈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나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은할아버지(임석제)는 주로 노동자 계층을 촬영했다. 육사를 졸업하고, 정훈국에 있었던 아버지와는 이념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 임준영 ] 아버지(임정의)는 ‘도시연구자’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1970년대 초, 사진 기자로 일할 땐 도심의 일상과 새마을운동 같은 다양한 활동 등을 기록했고, 1975년 입사한 건축 잡지 <공간>에선 각종 건축물을 촬영했으며, 1978년 ‘청암건축사진연구소’를 개설한 뒤로는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계획 같은 도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한국 정자와 자연의 모습 등을 기록하고 있다. 나의 작업도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잇는 중이다. 시간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건축과 도시, 공간’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만들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진의 기록성’에 집중한 것에 비해, 임준영은 다양한 작업을 한다.

[ 임준영 ]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개인작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시 기존 사진 프로세스와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이용했다. 또한, 도시에 펼쳐진 건축물을 카메라에 담았고, 학과장 추천으로 음식 사진 스튜디오에서 스태프로 일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포트폴리오를 들고 내 작업을 소개하러 다니던 중 현재 에이전시와 연이 닿았다. 그때부터 호텔, 카지노 등에서 건축·인테리어 사진을 찍었고, 공간 관련 광고 일도 했다. 사진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유학 시절 시작한 개인 작업(Like Water 시리즈) 역시 꾸준히 진행했다. 한때 화제가 됐던 자동차, 신용카드 광고사진처럼, 상업과 예술을 융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청암건축사진연구소’가 있었기에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를 잇는 유명 음식점을 보면, 레시피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나. 현대인의 취향과 니즈에 만족시키기 위해 과거의 맛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청암건축사진연구소’다.


셔터를 누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 임정의 ] 사진은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해 표현하는 작업이다. 순간적으로 찬스 메이킹을 해야 한다. 나라고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게 아니다. 운 좋게 빛과 공간이 조화로워지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빛을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촬영 위치에 따라, 화각에 따라, 시간에 따라 빛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 사진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 임준영 ] 촬영 전 머릿속에 작업 이미지를 완벽히 그려놓는 편이다. 현장 답사를 해야만 했던 예전과는 달리, 온라인 지도로 건물 위치와 주변 환경을 미리 확인할 수 있어 작업이 수월해졌다. 촬영 이후 포토샵으로 원하는 만큼 사진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긍정적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기능을 사용하다 보면, 헷갈릴 때가 있다. 정확하게 어느 부분까지 사용하겠다는 선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


(왼쪽) 눈 내리는 날, 서울 종로 2가, 1954 / (오른쪽) 6.25 전쟁으로 불에 탄 보신각종, 1950
(왼쪽) 제주도청사와 양떼들, 1947 / (오른쪽) 제주 해녀, 1957
임인식(1920-1998)은 국가 주요 행사와 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록했으며, 한국전쟁 종군 사진가로도 참여했다. 또한, 정부 주요 행사를 포함, 대한민국 전반에 걸친 삶의 현장을 촬영해 정부 및 해외 언론에 사진을 제공했다.


아버지가 보는 아들의 사진, 아들이 보는 아버지의 사진이 궁금하다.

[ 임정의 ] 포토샵을 이용한 후보정이 마음에 안 든다. 있는 그대로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것이 사진의 특징이자 장점 아닌가. 예전 건축 사진에는 전봇대가 나오는 일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그러려니 했다. 나와는 달리 아들의 <Like Water> 시리즈는 예술적으로 인기가 많다. 건축 사진에 역동적인 물의 흐름을 입힌 것을 보면, 생각하는 게 다르다. 무언가에 비유해서 사진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인가. 디지털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시대가 달라졌기에 받아들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부자지간의 협업은 없을 것이다.


[ 임준영 ] 할아버지와 아버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3대가 본 서울’을 기획한 적이 있다. 서울을 기록한 사진을 셀렉하는 동안 예술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의뢰가 아닌, 개인적으로 촬영한 사진이어서 그런 듯하다. 이들을 잘 가공해서 예쁜 결과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건축가, 학생 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최근 아버지 사진을 보면, 자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물안개 사진이 아름답다. 사진에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아들로서 자랑스럽다.


아버지 말을 안 듣고 사진가가 된 것도 집안 내력일까. 아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나?

[ 임정의 ] 아버지께서 아들만큼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어려움을 겪지 않길 바랐나 보다. 밥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건축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확히는 ‘건축’을 크게, ‘사진’을 작게 말했다. 그런데 임인식 아들이 건축한다고 알려지는 바람에 건물 설계해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 임준영 ]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사진 찍으면 춥고 배고프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보고 자란 게 사진인 것을 어떡하나. 집에 있었던 ‘인테리어 잡지’는 벗이나 다름없었다. 선과 면, 공간이 주는 매력에 푹 빠졌던 것 같다. 결국 하고 싶은 사진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 임정의 ] 필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 연구한다고 해서 빌려줬더니 깜깜무소식인 일도 있었고, 신문과 방송에 원본을 건네줬더니 얼마 후 되레 사진이 자기네 소유라고 우긴 적도 있었다. 요즘엔 저작권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한다. 사진계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진가의 권리는 사진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진을 제대로 공개하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워낙 방대한 양인지라 정리를 못 한 것도 있지만,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내용의 사진이 존재하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이러면 역사를 재해석한 사람들이 내용을 수정해야 할 텐데, 여전히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 임준영 ] 역시 저작권 문제. 공모전 할 때 작품에 대한 저작권에 기관에 귀속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교육에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흐름을 좇아가야 하는데, 너무 안에만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재조명이 필요한 사진가로 꼽히는 임석제, 우리나라 삶의 현장을 기록한 임인식 사진을 선보일 계획은?

[ 임준영 ] 아직 증조할아버지(임석제) 사진을 정리하지 못했다. 친척 집에 있던 사진을 직접 받아본 게 얼마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임인식) 사진을 정리한 다음, 들여다볼 계획이다. 일단, 오는 8월 12일부터 10월 4일까지 할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라이카 스토어 청담’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라이카 3F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직접 프린트해 선보일 예정이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북촌에 관한 이야기, 동시에 모두가 더불어 살았던 정겨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20. 08]


(왼쪽) 택시 안에서 시청 앞, 1974 / (오른쪽) 금호동 달동네, 1990
(왼쪽) 독립문 주변 차량들, 1969 / (오른쪽) 제주도청사와 주변 건물들, 2019
임정의(1944-)는 도시연구자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도심의 일상과 새마을운동의 다양할 활동 등을 기록했고, 각종 건축물을 촬영했으며,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계획 같은 도시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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