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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6. 2020

Red Line, 끝나지 않은 비극적 풍경

이재욱 

아름다운 풍경에 가려 쉬이 보이지 않는 제주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주 4·3사건’을 말하는 이재욱의 작업이다. 사진 속 ‘레드 라인’에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느낄 수 있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지된다.


Red Line #10, 2018
Red Line #9, 2018


아름다운 풍경에 그려진 그늘

주지하다시피 ‘제주 4·3사건’은 1947년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했다. 2003년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만 5천~3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2014년 희생자 추념일이 66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10여 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재욱은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확히 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7년 제주도 레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재욱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을 담은 그의 대표작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의 연장선에서 ‘제주 이주민’을 작업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서치 중 ‘제주 4·3사건’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제주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운 섬’에 가려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제주 4·3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으로 셔터를 누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의 역사적 비극을 몰랐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무작정 작업을 시작하는 대신, 많은 양의 관련 문헌을 꼼꼼히 들춰봤고, 생존자들을 만나서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이재욱은 카메라를 잡을 수 있었다.


Red Line #01, 2018
실제로는 보이지도 않던 저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무리 사진이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않아야 할) 것을 알지만, 쉬이 ‘레드 라인’을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Red Line #4, 2018


저 선을 넘어가지 마시오

‘제주 4·3사건’ 당시 “해안선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대다수의 중산간 마을이 ‘5km 경계’에 포함됐다. 인지할 수 없는 경계선 탓에 수많은 주민이 죽음을 맞이했다. 말 그대로 ‘초토화’ 됐다. 이처럼 생과 사를 갈랐던 경계선을 (비록 죽음이 압도적이었지만) 재현한 작업이 바로 이재욱의 <레드 라인<Red Line)>이다. 내비게이션과 측정 도구를 통해 한라산 분화구 기준, 해안선으로부터 5km 지점을 측정한 다음, 빨간색 레이저 포인터를 사용해 경계선을 재현했다.


커다랗게 프린트된 그의 작업 앞에 서니, 강렬한 빨간색 선이 내뿜는 서슬에 기가 죽을 정도다. 어찌 됐든 저 선을 넘어가면 빨갱이요, 군이 정해놓은 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 사실 아니던가. 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만 피부를 스쳐 가는 어스름한 저녁, 실제로는 보이지도 않던 저 선을 넘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무리 사진이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않아야 할) 것을 알지만, 쉬이 ‘레드 라인’을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레드 라인>은 ‘제주 4·3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업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이 모인 사회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그에 대응하는 견제 세력도 있어야 한다.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 시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역사의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에 균열이 생겼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이라는 무기력한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거를 끄집어내고, 반성하며,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아닐까. 이러한 개인이 모여야 불합리한 상황이 관성으로 다가오지 않을 테다. 이를 위해 우선시돼야 하는 건 지나간 시간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쉽게 잊기에 똑같은 일이 너무 쉽게 반복되는 오늘이다. 우리 주변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2020. 01]




이재욱 사회적 위기 속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을 낭만주의적 구도로 포착한 <너의 잘못이 아니야>로 제10회 KT&G SKOPF 올해의 최종 작가로 선정됐다. 홍익대학교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학에서 통합 디자인 사진 석사를 졸업했다. www.jaeuk.de


Red Line #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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