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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0. 2020

낭만에 대하여

노기훈

노기훈 작업 앞에서 흔히 마주하는 감정은 건조함과 담담함, 그리고 심심함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피사체를 극적으로 촬영한 것도 아니고, 작업 배경을 서사적으로 풀어낸 것도 아니다. 간혹 무심하게 들릴 때도 있지만, 작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말투처럼, 그가 직면한 사람과 사물을 조용하고 세심하게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노기훈의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느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Eclipse #017,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2018
Eclipse #004,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2018


장소가 주는 정서

노기훈이라는 작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업은 <1호선>(2013~2016)과 <구미>(2009~)다. 그는 <1호선>에서 한강철교가 준공되기 전인 1899년 그때의 경인선을 따라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있는 26개 역을 걸어 다니며 철로 곁을 떠다니는 인간 군상과 일상, 풍경을 촬영했고, <구미>에선 친구들의 모습(결혼식, 생업 현장 등)을 통해 고향인 구미를 덤덤하게 그려냈다. 그의 말마따나 작업에서 폼 재지 않고 피사체를 바라보았고, 개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강조하지 않았다. 더불어 두 작업 모두 촬영 장소가 어디인지 쉽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진에 숨어 있는 작은 힌트로 ‘그곳’을 유추할 뿐이다. 한정된 지역에 살면서 그곳의 시간을 이루고 있는 군상을, 외부자도 내부자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서 차분하게 조망하는 모양새다. 이런 작업 방식은 기호로 가득한 인간극장 느낌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선호하지 않는 개인 취향에서 기인한다.


노기훈의 작업 레이더는 과거의 시간이 기묘하게 퇴적된 공간을 만났을 때 발동한다. 그는 장소가 주는 정서에 특히 강한 끌림을 느낀다. 비록 사진에 사람과 사물이 담겨있지만, 이는 시각적 요소 성격이 짙다. 그의 작업은 사람과 사물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 공간이 주는 감성적 리듬에 따라 사유를 확장(예를 들어,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발생한 지역 간 경제·사회·문화적 차이 인식)하는 데 의의가 있다. 비평가 정현이 노기훈 작업에 관해 쓴 글을 보면 이해가 쉽다. 정현은 글에서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언급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 파리를 찾아가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영화는 기억의 원형에 물음을 던진다. 여기서 ‘파리’는 프랑스의 도시가 아닌, 미국 텍사스의 소도시 파리다. 제목만 보고 황홀한 무언가를 상상했다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것이다. 영화 속 파리는 ‘황량한 대지와 온기 없는 모텔, 퇴락한 상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파리’하면 생각나는 ‘낭만의 도시’라는 세뇌된 기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리고 ‘1호선’과 ‘구미’라는 이름에 각인된 우리 기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바로 노기훈의 작업이다. 현재의 모습을 통해 어떤 사건이 일어난 과거의 시간을 추적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는 허구적인 해석을 하지 않지만, 사진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혹은 강요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clipse #011,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2018
Eclipse #002,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2018                                        


오늘을 둘러싼 과거의 그림자

부산 BMW Photo Space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일식>(~11.9)도 마찬가지다. 전시는 일본 도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마쿠라(鎌倉)에서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마쿠라는 현대화 과정에서 고도 보존법에 따라 역사와 전통, 자연 풍경을 보호받은 지역이다. 덕분에 중세 시대 문화유산이 살아남았고, ‘관동의 교토’라는 수식어까지 얻게 됐다. 또한, 예술가(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 같은)는 물론이요, 과거의 낭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일식>은 노기훈이 요코하마 레지던시 입주 시절 진행한 작업이다. 그는 주말마다 방문한 가마쿠라에서 ‘낭만’을 발견했다. 후지산 만년설 위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연인들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마음이 동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해에 흠뻑 젖어 환하게 날아간 앞모습과 달리, 연인들과 노기훈 사이에는 점점 윤곽선만 짙어져 검은 형태로만 인식되는 뒷모습이 있었다. 눈부심으로 말미암은 흑백 대비는 마치 달과 태양의 우아한 만남, 일식을 보는 듯했다. 흑백의 낭만은 더 나아가 근대 사진술로 연동됐다. 현재 전시가 열리고 있는 BMW Photo Space는 근대의 낭만과 사진술이 재현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채권 만들 때 사용되는 종이에 프린트한 아련한 흑백 이미지, 매트, 원목 액자, 조명 등 모든 것이 예스럽다. 전시장 구조도 시간의 간극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빛과 어둠, 사랑과 숭고, 삶과 죽음 같은 근대에 타올랐던 가치를 체험하는 동시에 사진의 계보학적 측면도 생각할 수 있다. 부산의 현대 구조물 안에서 노기훈이 가마쿠라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감각하는 셈이다.


<일식> 역시 기존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노기훈의 작업은 공간과 사람, 사물의 표면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대신(1호선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는 것처럼), 현재의 모습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고, 사유를 확장한다. 흔한 말로 ‘온고지신’이다. <1호선>과 <구미>가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발생한 문제들로 연결된다면, <일식>은 분명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퇴색해버린 근대의 감정과 사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단, 과거의 시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셔터를 누른다고 해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과거의 존재했음’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이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노기훈이 이미지만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제반 요소를 결합해 전시장에 구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보는 이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할 수 있을 테니까.


작업은 속보성과 자극성이 중시되는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이 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도 생각하게끔 한다. 급격한 매체 변화에 길든다면, 사진은 단지 파편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사건을 그저 ‘이미 일어난 이벤트’로만 보는 것이 아닌,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추적하는 과정이 수반돼야 사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노기훈의 작업이 다큐멘터리 사진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019. 11]




노기훈 한 지역에 살면서 그곳의 시간을 쌓는 군상을 담담하게 조망하는 작업을 한다. 개인의 에피소드를 강조하지도, 촬영 장소가 어디인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저 사람들을 풍경처럼 담아내며, 그 이면에 축적된 사회적 상황을 포착할 뿐이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진학과 순수사진 전공 석사를 졸업했다. www.no-ki.com


노기훈의 개인전 <일식>이 진행 중인 부산 BMW Photo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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