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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28. 2020

기억을 걷는 시간

정승원

‘포토그래퍼스 갤러리’가 올해 처음 시작한 ‘TPG New Talent’에서 정승원이 최종 8인에 뽑혔다. 사진이 프린트된 직물의 실을 한 올 한 올 뽑아 이미지를 변형시킨 그의 작업 <Memories Full of Forgetting>은 연약한 ‘인간 기억’을 주제로 한다.


Memories Full of Forgetting, 2017


공중에 부유하는 사진

영국 런던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가 주관하는 ‘TPG New Talent’는 사진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영국 내 작가를 대상으로 전시와 멘토링을 지원하는 ‘신진작가 발굴 프로그램’이다. 올해 처음 시작한 이 프로그램에서 <Memories Full of Forgetting>을 선보인 정승원이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최종 8인에 뽑혔다.


<Memories Full of Forgetting>은 ‘인간 기억’에 관한 작업이다. 사진을 프린트한 직물의 실을 한 올 한 올 뽑아 이미지를 변형시킨 다음, 이를 자석으로 종이 위에 고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독특한 작업 방식만큼이나 전시 형식도 간간하다. 벽면에 작업을 납작하게 밀착하는 대신, 직물의 공간적 부피를 부각시키는 쪽을 택했다. 마치 ‘알라딘의 마법 양탄자’가 공중에 부유한 듯한 느낌이다. 작업을 입체적으로 설치한 건 개인 관심사에서 비롯됐다. 정승원에게 직물과 사진은 평면을 넘어 3차원 조각으로 다가오는 매체다. 직물의 특징은 씨실(위사)과 날실(경사)이 만난 교차점들이 쌓여 표면을 이루고, 표면의 움직임이 부피감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직물의 유연성과 잠재성(하나의 긴 실이 천 조각이 될지, 아니면 서로 뭉쳐져 실타래가 될지 같은)이 정승원에게 조각의 개념으로 다가왔으리라. 게다가 하나의 디지털 이미지는 수많은 픽셀이 모여 완성된다. 그리고 이미지를 구부러트리거나 휘면 직물과 마찬가지로 입체감이 생긴다. 더욱이 그에게 사진이란 ‘Flux’, 다시 말해,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매체요, 시간을 수집하기 위한 도구이자 언제든 움직이고 탈바꿈할 수 있는 유동적인 존재다. 사진과 직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필연일 수밖에 없는 너무도 자명한 조건이다.

Forgetting Full of Memories, 2017


바래져 가는 기억

‘직물’과 ‘디지털 이미지’를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자. ‘시간’과 ‘공간’이 정승원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씨실과 날실을 한 땀 한 땀 엮는 과정에선 물리적인 시간을, 레이어가 쌓여 만들어진 옅은 틈(공간)에 선 감각적인 시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기억’ 아닐까. 기억을 향한 정승원의 관심은 초기작인 <Kyung Ae, 경애>에서부터 시작됐다. 사진 목걸이 펜던트와 똑 닮은 대나무 틀 위에 사진과 자수를 함께 올려놓은 이 작업은 할머니를 주제로 한다. 눈에 띄는 건 점층적인 자수다. 사진이 점점 자수에 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혼동되는 시공간을 표현한 듯하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보편적인 관심으로 확장됐고(Time Grid 작업), 더 나아가서는 거대한 개념의 시간(지질학적)을 탐구하는 현재의 작업(Digital Strata)으로 이어졌다. 정승원의 홈페이지를 보면, 작업에 사용한 이미지가 초기엔 구체적이었다가 모호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업이 개인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이동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그중 Time Grid는 특정 기억과 공간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리드’라는 좌표 위에서 우리가 시간을 인지할 때 경험하는 간극과 왜곡을 말한다).


실을 매개체로 어떤 것을 연결하는 행위는 자기 고백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전형적인 클리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작가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와 줄리 콕번(Julie Cockburn)이 있다(실제 정승원은 루이스 부르주아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정승원의 직물 역시 연약한 기억들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천 위에 이미지를 인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천을 구성하는 실을 풀어내면 전체적인 사각형의 틀은 남아있지만, 실이 그려낸 이미지는 처음과 달라져 있지 않은가. 사건의 토대가 되는 커다란 틀은 유지하되, 세부 내용은 조금씩 왜곡되는 우리의 기억 회로와 참 많이 닮았다. 또한, 천은 우리 피부와 늘 맞닿아 있어 ‘기억’을 말하기에 제격인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승원 작업의 차별점은 설치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직물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연약한 기억을 형상화하는 모양새다. 작업 아래 매달린 돌도 주목해야 한다. 작업이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하는 문진 역할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바래져가는 기억을 잡겠다는 의지로 더 강하게 읽힌다. 다만, 정승원의 작업은 <Kyung Ae>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무언가(개인사)를 지칭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보는 이는 작가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대신, 변형된 직물에 자신의 기억을 투영해야 한다. 정승원의 작업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자신에게 물을 차례다. 당신 기억 속 시간의 흔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2019. 10]




정승원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 보편적인 시공간, 거대한 개념의 시간(지질학적)에 대해 탐구한 내용을 직물과 사진을 이용해 표현한다. 영국 런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가 올해 처음 시작한 ‘TPG New Talent’ 최종 8인에 뽑혔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www.jungseung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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