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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Sep 30. 2020

위로받는 순간

우리는 종종 ‘막연한 불안함’을 마주한다. 외롭고 불안할 때마다 당신을 위로해주는 건 무엇인가.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 중인 기획자, 작가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위안을 주는 글과 음악은 무엇인가요.


Chick Corea and Gary Burton in Concert, Zürich, October 28, 1979, ECM


사진작가 김규식

몇 년 전 혁신파크에서 진행된 <서울레코드페어>에 갔었다. 늘 그렇듯 재즈 전문코너에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맘에 드는 LP를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ECM에서 발매한 칙 코리아와 개리 버튼의 취리히 공연실황이었다. 이미 CD로 가지고 있었지만, 다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아마 2003~4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홍대의 리브로에는 유명 카페와 서점 그리고 레코드가게가 있었다. 리브로는 오며 가며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1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기에 레코드가게만 한 곳도 없었다. 그날도 시간을 보낼 겸 그곳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뒤지다가 그 CD를 손에 들자 점원이 대뜸 말을 걸었다. “자취하시죠?” 음…. 이 알 듯 말 듯 한 소리에 좀 헷갈렸지만, 나는 자취 생활을 접고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아뇨.”라고 대답했다. 내가 궁금한 눈으로 빤히 보고 있자 그는 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제가 자취할 때 자주 듣던 CD라서요.” 그는 평소 말이 없는 편이지만, 가끔 나에게 CD를 추천해주었고 나는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더 아무 말도 없이 CD를 사서 나왔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방구석에서 들었을 그와 나의 모습은 묘한 공감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앨범이다. 표지 사진도 취리히의 차갑고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결국, LP를 사서 혁신파크를 나왔다. CD보다 훨씬 큰 LP는 더 큰 위안이 될 것이므로.




김마리, <모래도시> 표지, 허수경 작가의 소설 속 페르소나인 세 주인공과 그들이 그리워하는 공통의 장소를 떠올리며 그렸다.


나는 그때 이 세상에는 이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도 그냥 전해져오는 사람들 사이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잘 모르고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자꾸 슬픔으로 잠겨 들어갔던 것 같다. 커튼이 내어놓은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의 주름 사이로 햇빛은 마른 건초를 말리는 가을빛처럼 스며들었다.
그 빛은 그를 조금씩 조금씩 말리고 저러다 그는 다 말라 가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상한 일은 그는 마르지만 내 마음은 우윳빛 은하수가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 허수경, <모래도시> 중


북디자이너 김마리

삶이 그저 그렇거나, 조금 더 좋지 않은 순간들의 연속일 때는 소설을 읽는다. 그러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가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런 날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다.




류주현, <몸의 부스러기>, 2017, Pigment Print, Variable Size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사진작가 류주현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이다. 그중에서도 <어느 늦은 저녁 나는>과 <회복기의 노래> 부분을 왕왕 펼쳐본다. 이 시집 속에 담긴 시를 읽을 때면, 마음이 먹먹하기도 하고, 휑하기도 하면서 묘한 위로와 힘을 얻는다.




박지원, <신중탱화(神衆幀畵)>, 2020, 캔버스에 유화, 아크릴, 스프레이, 130.3x162cm


1+1=2 … 1+1=2인데, 1+1=1이 될 수 있을까?

- 영화 <그을린 사랑> 중


회화작가 박지원

영화 <그을린 사랑> 주인공인 수학자 잔느는 어머니 유언에 따라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잃어버린 형을 찾아 떠난다. 출생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수학적, 합리적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을 마주한다. 현실에서 1+1=2가 아니게 되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에 ‘마땅히’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개별 역사와 연원을 파악한다면,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마주하기 싫은 슬픈 과거도, 아픈 모습도 세상 일부분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을 좀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군기지를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전시 <일어나지도 않은>에 참여한 배성미의 작업


분에 넘치는 논리를 구사하려 되지도 않는 애를 써 가면서 권위를 붙이려고 하느니보다,
소박한 심정 토로 같이 에세이라도 정직하게 쓰는 편이 어느 모로나 유익하다.

- 김수영 전집 내 <본색을 드러낸 현대성> 중


‘오픈스페이스 배’ 큐레이터 추희정

젊은 작가들의 글을 비평하며 쓴 김수영의 글이다. 진솔한 글쓰기에 대한 충고가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작업 관련 글을 쓰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글이 설명이나 감상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어쭙잖은 논리로 작가의 부단한 세계를 헛되이 소진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예전에 기획했던, 배성미 & 나미나의 <일어나지도 않은>이 떠오른다. 전시를 준비하며 김수영의 글들을 다시 들춰보았다. 불편해서 또는 무관심으로 인해 그냥 거기 두었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끄집어내는 작업의 과정, 불을 끄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어야 할 두 작가의 밤을 생각하며 전시를 준비했었다. 작가의 고단함이 깨어낸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를 고단하게 하지만 그로 인해 깨어있고 살아갈 수 있는 생의 아이러니. 불편한 문제를 끊임없이 들춰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홍지윤, Wonderland, 2020


색연필로 인생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내 인생의 그림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만약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색연필이나 무슨 그런 것으로 하나하나 색칠하면서 구분한다면,
‘어떻게 하다 보니’라는 부분을 칠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색연필이 필요할 것 같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중


사진작가 홍지윤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을 계획하지만,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늘 데려다주진 않는다. 다들 어떻게 하다 보니, 그곳에 가 있었을 것이고, 나 또한 어떻게 하다 보니, 이 길에 있었으므로, 작업 면에서는 늘 완벽해지고 싶지만 그렇게 잘되지 않고, 완벽해지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린다.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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