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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pr 09. 2021

아제, 아제, 바라아제

삼불경

옷을 입었는데 벨트를 벗는 소리가 자극적이다. 그 남자의 몸을 지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숙일 때 찍으려 했다. 옷을 내리는 과정에서 촬영을 했다. 옷을 벗을 때 지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카메라가 있어 나의 음란한 생각이 들킬 것 같았다. 촬영 전엔 어색할 것 같았으나 내가 벗는 것이 아니라 긴장되지 않았다. 인사하고 작은 공간에 있으니 눈 마주침이 당황스러웠고 아는 사람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 진실의 말


혹, 지금 ‘비판적 시선으로 작업을 파헤치련다.’라는 다분히 현대미술적인 다짐을 하고 있다면, 부디 오늘은 그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길 바란다. 김지숙과 이언경의 <삼불경>은 겉과 속이 다른 우리 시선을 지극히 세속적으로 풀어보고자 마련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여기 모인 우리는 무언가를 꿰뚫는 시선을 갖고 있다고 믿는 존재들일 테다. 시이불견(視而不見,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에 가깝겠지만, 이와는 반대로 그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자신이 매우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가. 이제 마지막 관문이다. 레드썬에서 깨어나 공간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긴 다음, 주변을 둘러보시라. 수많은 시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찍자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셔터 누를 때 쳐다본 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촬영 시 색이 너무 예뻤다. 다시 촬영하게 된다면 쳐다보면서 찍고 싶다. - 미애의


<삼불경>은 이중잣대에 가까운 우리 시선을 차용, 유쾌한 분위기에서 사진을 ‘본다’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의 음(音)을 가진 단어가 쓰임새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처럼, <삼불경>은 대상이 이미지 표면 위에 ‘안착’했을 때 대상의 본디 기능과 형태는 촬영자가 아닌, 수용자에 의해 재정의될 수 있음을 살펴보는 데 의의가 있다. 일견, 김지숙과 이언경 작업 사이에는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먼저, 김지숙의 <I See You>는 ‘매체는 왜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 다루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김지숙은 실제 여성이 관음의 주체가 되었을 때 드러나는 감정을 통해 ‘관음’의 개념과 지각하는 방식을 고민하고자 한다. 한편, 이언경의 <솜사탕과 부처>는 독실한 불자였던 할아버지의 타계를 모티브로 하는 작업이다. 비슷한 이미지(무덤과 임부의 배 같은)를 병치, 부재를 둘러싼 작가의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미리 인식해서 인지 스스로를 연출하게 되고 모델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마네킹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촬영 후에 다시 한번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른 체형이지만 성기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숙의 말


형식과 형태적 공감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작업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감상하다 보면, ‘시선’이라는 공통의 펀치라인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을 오가는 표리부동한 시선이랄까. 김지숙의 <I See You>는 스튜디오 안에서 ‘인위적’으로 세팅된 작업이지만, 시선의 움직임은 ‘자연스럽다’. 사진 속 주인공들의 눈치 싸움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렇지만 결국에는 다 본 우리의 관음적 시선이 떠오른다. 반면, 이언경의 <솜사탕과 부처>는 스냅 형식으로 ‘감각의 리듬’에 따라 촬영된 결과물이지만, 이들을 엮는 과정에서 작가의 강한 ‘개입’이 일어난다. 사진 조합의 개연성을 명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 촬영 당시 작가의 정신적/육체적 상태가 어땠을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이 직조됐을 때 파급력이 배가된다는 사실은 쉬이 알아챌 수 있다. 이러한 김지숙과 이언경의 작업에서 파생된 ‘시선’을 풀어내기 위해 빌린 단어는 ‘불경’이다. 하나는 ‘놀라서 보는 게 아니다’라는 의의의 불경(不睘)이요, 다른 하나는 ‘예의가 없다’를 뜻하는 불경(不敬), 마지막은 ‘불교의 경전’을 가리키는 불경(佛經)이다.


찍기 전엔 너무 긴장되고 눈이 마주칠까 걱정되었다. 나는 쳐다보려고 했으나 긴장해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슬쩍 보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쳐다보지도 않았다. - 효숙의 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경(不睘, 결국에는 다 본 우리의 관음적 시선을 빗댐)과 불경(佛經, 독실한 불자였던 할아버지를 상징)으로 점철된 작업을 만나볼 수 있는 <삼불경>은 ‘본다’라는 행위에 의문을 던지는 전시다. 다시 말해, 불경(佛經)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맥락상 작업에 경건하게 다가가야 할 것 같지만, 되레 이를 불경(不敬)하게 바라봄으로써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인 요소와 외부 개입(시선, 텍스트 등의) 간의 역학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김지숙과 이언경 작업에서 추출하여 만든 사진 조합을 처음 본다면, 분명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모호하고 연관성이 없는 현상이나 자극에서 일정한 패턴을 추출해 연관된 의미를 도출하려는 심리 현상)적 성향에 따라 각자의 내러티브를 그려내게 될 것이다. 당연히 상상에 정답은 없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다. 그러나 여기에 김지숙 작업과 궤를 같이하는 텍스트가 더해진다면, 우리의 상상은 특정 답을 향하게 될 확률이 높다. “실재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오직 상상적인 것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이고, 그 본질적 구조 속에 세계의 무화를 포함하고 있는 가치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상상계 문턱까지 갔다가 어떤 개입으로 인해 이내 돌아오게 되는 셈이다.


여자 다섯 명에 남자 하나라니.. 폭력적인 느낌이 들었다. 화장을 하고 찍으니 자신감이 붙었고 나도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이 강했다. - 유진의 말


이는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정작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 혹은 시이불견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작품 고유의 특징은 개념적 지식을 창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라는 손탁의 말처럼,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gate, gate, paragate)로 나아가야 하는데, 사진 외적인 요소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기실, 사진을 이해하게 하면서, 동시에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 텍스트뿐이랴. 주변 시선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휘감은 공기 흐름에 휩쓸려 독창성을 잃는 부화뇌동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수단과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한 장의 사진은 천 번 흔들렸음에도 견고함과는 거리가 먼 연약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감상이라는 틀 안에만 갇히면, 일방적인/종속적인 상태에 수렴하게 되는 것일까. 왜 사진을 경직된 대상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어쩌면 당신과 내가 자부하는 ‘무언가를 꿰뚫는 시선’이란 이미 정해진 답을 선점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시선은 어떠한가. 부디 <삼불경> 안에서만큼은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플롯을 구성해보길 바란다. [2021. 04]




김지숙 (kimzisook.com) & 이언경 (ongiong.com)

와이아트갤러리 (중구 퇴계로27길 28, 지하 1층)

2021년 4월 2일 ~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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