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성
지긋지긋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코로나-19’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라는 재난문자를 알람 삼아 하루를 시작했건만, 집에 돌아갈 무렵에도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받는 일이 익숙해진 요즘이다. 2단계와 3단계를 넘나드는, 이와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 권유 문자는 ‘전송’ 버튼 한 번이면, 찰나의 순간 한라에서 DMZ까지 전파된다. 이쯤에서 잠시 스마트폰 ‘코로나-19’ 알림 기록을 확인해보자. 문자 속에 다양한 ‘클리셰(대중교통, 집회, 카페 등)’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단연 ‘종교’다. 주지하다시피 자칭 ‘신(神)의 대리인’ 발(發) 메시지가 사방팔방으로 퍼진 데서 기인한 결과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국을 보고 있노라면, ‘코로나-19’와 ‘시편 19편(신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다)’이 묘하게 중첩됐음을 느낌과 동시에, ‘신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신(神)’을 주제로 하는 오제성 작업과 마주했을 때 마음은 ‘착잡함’ 그 자체였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작업이 신과 관련된 현상을 살펴보는 것인지, 아니면 이를 비판하는 것인지 판단이 잘 안 섰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모두 다 잘 살자고 신을 믿는 것일 터인데, 작금의 상황이 신병(新病)인지, 신병(神病)인지 헷갈렸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맹신과 헌신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적확하게 설명 가능한지 여전히 의문이기도 하고. 그러나 다행히(?)도 오제성 작업 기저에는 ‘여기나 저기나 존재하는 한국의 신들은 서로 싸우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한데 어울려 각자 소임을 할 뿐이다.’라는 기본 관념이 깔려있다. 일단, ‘현상’을 관찰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제성 작업은 지금 우리가 관통하고 있는 종교 ‘뉴노멀(New-normal)’ 시대 –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신 – 를 살펴보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고 할 수 있다.
오제성은 전국 방방곡곡 유명(有名) 무명(無名) 가리지 않고, 동네를 지켜준다는 신이란 신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은 ‘영상’과 ‘세라믹’으로 분류된다. 먼저, ‘을지로 OF’에서 선보인 <신과 신들의 고향>은 풍물시장에 자리 잡은 신상(神像)을 주인공으로 한 영상 작업이다. 사이키델릭한 시각 효과와 경쾌하고 비장한 음악을 조합한 것이 이목을 집중시킨다.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신들(부처, 예수 등)이 매대 위에서 크기와 재질별로 분류되고, 이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에선 성스러울 조각상이 누군가에게는 상품으로 치부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장면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신중탱화’, ‘무속도’가 연상되는 이러한 쇼트는 ‘신은 하나다. 누군가의 믿음, 장소성에 따라 대상과 형태만 바뀔 뿐이다.’라고 피력하는 것 같다. 비록 유명한 신이지만, 출처가 어딘지 밝히는 게 꺼림칙한 <신과 신들의 고향>과는 달리, ‘스페이스 사랑농장’에 전시된 <Index> 속 신의 행방은 묘연함과는 거리가 멀다. <Index>는 마을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신의 형상을 ‘3D 스캔’한 다음, 이를 토대로 만든 거푸집 안에 흙을 넣어 제작한 작업이다. 작업 분위기는 흙 위에 입힌 색에 의해 결정되는데, 완성된 형형색색의 세라믹은 마치 ‘뿌리가 같은 신이라도 어떻게 토착화됐느냐에 따라 생김새가 달라진다.’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또한, 작업은 신의 존재감도 강화하는 모양새다. 거푸집만 있으면 무한정으로 세라믹 복제가 돼, 언제 어디서든 신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 보고 만진 뒤에 믿겠다.’라는 과거의 구절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두 작업을 병치해 놓으니, ‘신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라는 말이 재차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연장선에서 <신과 신들의 고향>은 ‘거시적 관점(어디에나 신은 있다)’에, <Index>는 ‘미시적 관점(어디에도 없는 신을 어디에나 있게 하는 기술)’에 가까운 작업이다. 종합하자면, 관념과 실체가 만나 ‘뉴노멀’ 적인 종교 기준을 충족시킨 셈이다. 여기에 큰 몫을 한 건 ‘탈경계’다. 탈경계는 ‘어떤 분야와 다른 분야를 가르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지칭한다. 철학적으로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현상/행위 등으로 설명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상호교섭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탈경계 중심에는 ‘조각(적)’과 ‘사진(적)’의 하이브리드가 있다. 오제성 작업에는 ‘전통적 미술 형식(작업 모든 것을 작가 손끝에서 끝냄)’과 ‘포스트-인터넷 형식(작가가 제작 모든 분야에 개입할 필요는 없음)’, 사진의 기록적 속성을 이용하는 3D 프린팅, 가상공간에서 부유하는 이미지 등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이는 <신과 신들의 고향>은 (전통 미술에 가까운) 기성품을 이용해 신을 둘러싼 ‘관념’을 녹여낸 작업이요, <Index>는 (포스트-인터넷 형식을 차용한) 작가가 직접 제작한 세라믹으로 신의 ‘실체’를 드러낸 작업이라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을 최종적으로 수용하는 건 ‘사진(적)’이다. 사진의 기록성이 없었다면, 현실과 가상공간을 부유하는 사진의 속성이 없었다면, 작업은 유동성(유연성)으로 대표되는 ‘조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 비슷한 맥락으로, ‘사진(적)’이 있었기에 제한된 상태에서도 신을 영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서는, ‘웹 2.0이 웹 3.0으로 완벽히 전환된다면,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에 부합하는 커스터마이징 신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까지 해본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조각(적)’과 ‘사진(적)’을 결합한 오제성 작업의 ‘뉴노멀’ 적인 종교 기준을 살짝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신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말이다.
‘관념/실체가 깃든 영상/세라믹 작업 안에서 대중성과 보편성을 얻은 신(神)’ 정도로 위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겠다. 오제성은 <신과 신들의 고향>과 <Index>에 관해 “책 마지막에 있는 ‘색인’ 같은 작업이다. 이를 통해 현대적 의미의 신화, 전설 등을 재창조하고, 흘러간 시간 속에서 유실된 한국의 전통성, 동북아시아만의 특질을 찾아보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훗날 작업이 거대서사로 점철되리라!’라는 출사표처럼 들린다. 이 대목에서 우려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끝마치기엔 작업 범주가 어마어마하다는 것. 지금이야 ‘신 이야기’가 출발선상에 있어 이내 작업에 공감할 수 있지만, 범위가 넓어졌을 땐 작업을 모으는 응집력이 떨어질 확률이 높다. 혹여, 관성에 이끌려 <신과 신들의 고향>, <Index>에서 감지되는 ‘현상 관찰’과 ‘생산’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작업은 분명 출사표와 엇갈린 방향으로 흘러갈 테다. 꺾꽂이했던 것들을 엮는 것에만 신경 쓰기보다는, 커다란 줄기를 중심으로 가지치기하는 식의 작업 다변화를 한 번쯤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지금으로서는 신을 향한 오제성의 도전에 지지와 성원을 보낼 생각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그의 작업은 ‘신’을 주제로 하는 인류학적 아카이브가 될 것이요, 종교에서 파생한 우리네 ‘스펙터클(기 드브로: 사회적으로 지배하는 삶의 현존하는 모델. 현실은 스펙터클 내부에서 솟아나고, 스펙터클은 현실이 된다)’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0. 09]
*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세라믹창작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
오제성 자신 주변의 상황, 기억, 공간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를 서사가 있는 영상, 사진, 조각 등의 매체로 표현한다. 작품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 문학, 미술, 설화, 영화 등의 요소를 응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소 조악한 오브제와의 연출을 보여주거나, 엉뚱하고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여 작가만의 색채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