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선
#1 하룻밤에 백만 원을 번 여자는 퇴근하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옆 테이블 남자가 혀를 찬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오빠라 불렀고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낸 적이 있었다.
#2 누구는 일하다가 자기 아버지가 골목을 기웃거리는 것을 봤다고 했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양 손으로 얼굴만 가리고 있었다고 했다.
#3 술 취한 나를 태우고 골목을 빙빙 돌며 누가 마음에 드는지 골라보라며 농을 던졌다. 창밖에 있는 가게가 바로 우리 집이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혹여나 누나들이 날 알아볼까 봐 얼굴을 숨기기에 바빴다. 매일 드나들던 곳인데 와선 안 될 곳을 온 것처럼 느껴졌다.
지리멸렬한 공간에서
사진가 김용선의 <모범약국 옆 두 번째 빨간 집> 작업노트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들이다. 머릿속으로 세 개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뉴스나 드라마, 영화에서 봤을 수도 있고, 혹은 얼큰히 취한 날 유흥가 중심에서 비틀거리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지만 화들짝 놀라 이내 발걸음을 돌렸던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곳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금기시되는 공간이자 김용선 작업의 배경이 된 ‘홍등가’다.
홍등가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붉은 빛이 행인의 시신경과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시험하게 만드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홍등가’를 주제로 한다고 해서 김용선의 작업을 여느 작업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직업여성들의 애환을 담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극적으로 그것도 몰래 찍은 사진들과는 분명 다른 맥락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관조적이고 담담하다 못해 덤덤하며, 때로는 무미건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사진 속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생활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마지막 장이자 낯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지리멸렬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떨림의 진실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홍등가’는 사진가 김용선이 생활했던 공간이다. 그는 홍등가 안과 밖을 오가며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동안 어떤 ‘경계’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작업을 수없이 봐왔지만, 김용선의 작업은 뭔가 다르다. 그는 ‘경계’ 작업의 스테레오타입이라 할 수 있는, 차가우면서 객관화에 사로잡힌 기계적인 형식을 포기했다. 대신 경계로부터 파생되는 애매모호하고 연약한 감정을 애써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냈다는 생각이 든다. 통일감 없는 형식과 불완전한 구도, 흔들림이 혼재되어 있는 사진에선 “이제부터 내 비밀을 말해볼게. 하지만 여전히 갈등이 되는군.”이라고 말할 때의 떨림과 망설임, 불완전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는 작가와의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작업을 위해 특별히 ‘홍등가’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장소가 ‘홍등가’였을 뿐이다. 뒷골목에서 좁고 빨간 집을 운영하는 것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어머니의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였다. 쉬는 날이면 남들과 똑같이 휴식을 취했고, 일하는 누나들과도 거리낌 없이 지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삶의 터전이 낯설게 다가왔다. 함께 지내던 누나들은 소리 소문 없이 하나둘씩 떠났다. 골목 안 보통 사람들 대열에 있다가도 집에 가기 위해선 쭈뼛쭈뼛 눈치를 보는 사람들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도 어색해졌다. 혹여나 주변 사람들과 집 앞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했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다. 글이든 사진이든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속 안에 있는 것들을 게워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지가 관여되지 않은
안과 밖에서 보는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상충되는 것들을 주된 대상으로 했다. 일례로, 똑같은 숟가락이지만 붉은 조명을 받았을 때와 자연의 빛을 받았을 때의 기운이 다르다는 사실이 가슴을 찔렀다. 환경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숟가락의 모습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설을 한다고 해서 그토록 고민하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작업과 삶을 동일선상에 놓고 오랜 시간 자신의 시간을 반추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모범약국 옆 두 번째 빨간 집>은 현재진행형 작업이 되는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빨간 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 가족의 생업이 전환된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완벽한 외부인으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방문한 그곳에서 김용선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축적된 시간의 한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만 같았다. 그땐 왜 지독히도 자신을 내부인으로 규정짓고 싶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엔 자신의 의지가 관여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빨간 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빨간 집’이 매각된지라 더 이상의 작업 진행도 어려워 보였다. 용단을 내렸다. 과감하게 작업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빨간 집’을 둘러싼 상황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김용선은 명료한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설혹 실패를 한다 한들 뭐 그리 대수일까 싶다. 모호했던 대장정의 끝맺음을 자신의 의지로 한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작업을 위해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억지로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있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을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2017.09]
김용선 계명대학교 사진영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원 재학 중이다. 2015년 대구 가창창작스튜디오와 중국미술학원국가대학과학기술(창의)원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2017년 개인전 <모범약국 옆 두 번째 빨간 집> 포함, 세 번의 개인전과 세 번의 단체전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