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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Oct 31. 2021

기술과 생각의 진화

정영호 

5e011a037b1b30000700e363, , Archival pigment print, 103x140cm, 2020                  


지난 2월 ‘송은 아트큐브’에서 열린 <Out of Photography>에서 정영호는 세 개의 시리즈 - <Unphotographable Cases>, <Lightless Photography>, <Face Shopping> - 를 선보인 바 있다. 그중 ‘다큐멘터리적’인 두 개의 작업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특정 사건과 연관된 키워드 데이터를 3D 모델링한 다음, 사진으로 촬영한 <Unphotographable Cases>와 DMZ 근무 시절 소형 모니터를 통해 북한군의 모습을 처음 접하고 느낀 복합적 감정(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을 인공지능 초상사진에 녹여낸 <Face Shopping>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작업은 기술이 우리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데 의의가 있다.


5e011ee77b1b300007085775, 2020 / (왼쪽) Detail
 두 죽음, <Unphotographable Cases>, 2020 / Covid-19, <Unphotographable Case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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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 ‘송은 아트큐브’에서 열렸던 개인전을 잠시 소환해 보자. 당시 선보인 작업의 모티브와 이들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연결고리는 ‘기술’이다. 내가 추적하고 있는 것은 ‘생각의 유통’이다(이전 작업에서는 오프라인 속 생각의 유통경로로서 집회를 탐구했다). 동시대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기술이 생각의 형성을 견인하고, 유통경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생각 본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에 대해 예민하게 감각하면, 생각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제 아래 작업하고 있다.

<Unphotographable Cases>는 생각의 유통이 온라인 공간(익명)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점에 주목하여 시작한 작업이다. 구글 트렌드의 키워드 검색 데이터를 이용, 특정 기간에 사건이 어떤 강도와 빈도로 화제성을 띠는지를 모델로 만들고, 이를 3D 프린터로 출력한 다음, 결과물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이때 사진은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외양을 좇는다. <Face Shopping>은 스크린 안에 존재하는 AI 초상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동시대 환경에서 ‘가상이 실재를 압도하고 있음’을 자주 감지한다. 사람보다 더 사람같이 프로그래밍 된 초상사진을 실제 사람이 어떻게 접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스마트폰에 AI 초상사진을 띄워 놓고, 접사 촬영했다. 작업을 좇다 보면, 묘하게 닮은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Unphotographable Cases>의 경우 3D 프린트 자체가 최종 결과물이 될 수 있을 텐데, 이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한 이유가 궁금하다.

‘데이터 그래프와 사진’, ‘가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혼란을 주고 싶었다. 사진은 실제 장소에서 일어나는 장면만 담을 수 있다. ‘공분’을 예로 들면, ‘공분’이 일어나는 모습을 하나의 완벽한 장면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더는 가상 세계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때로는 가상이 현실보다 더 솔직하기도 하고, 파급력도 엄청나다. 스스로 가상과 현실 사이의 선을 긋기가 어렵다. ‘사진적임’을 통해 이러한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Woman in North Korea, , 2015                                


클래식한 관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라는 신화를 신봉하는 장르다. 분명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두 작업은 명징함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맥락이 단번에 읽히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 형식과 태도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작업에 어떻게 활용했나.

다큐멘터리 장르의 핵심은 ‘정보를 다루는 방식’ 아닐까. 정보 가치에서 벗어나 작가 관점이 강하게 투영될 때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 내 작업은 사회적인 사건들을 다루지만, 그것들이 객관적인 증거 혹은 정보로서의 유용성을 잃어버렸기에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다큐멘터리적’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내 작업은 정보적 유용성을 의도적으로 적절히 지워내는 것을 필요로 한다. 작업이 어떤 사건으로부터 혹은 어떤 데이터로부터 기인한 사실은 매우 중요하나, 이에 작업이 압도된다면 보고서와 같은 사실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위의 질문에 이어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레이어 뒤에 숨긴 작업의 경우, 즉 도큐먼트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 작업이 말하는 것과 읽히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 관점에서 의도와 해석이 일치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자의적인 이미지 읽기가 더 중요할까.

해석의 불확실성이 필요한 매체가 있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사례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은 단단하고 구체적이기에 자유로운 해석이 미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도 이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시각 예술은 문학과 비교할 때 매체 자체의 구체성 혹은 전달력이 떨어진다. 더욱이 복잡해져 가는 시각예술 작품의 내적 논리나 압축된 평면을 바라볼 때 해석 가능성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이는 창작자와 수용자의 역량에 달려있기보다는, 동시대 미술이라는 매체와 환경의 결과로 봐야 할 듯하다. 나는 관람자로서든 창작자로서든 좁은 여지의 해석을 선호한다. 연장선에서, 이해와 감상의 영역을 분리해서 접근한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작가 관점을 적절히 이해해야 감상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확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감상하는 것을 적절한 감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Soldier Waiting for Ambulance in North Korea, , 2015                                



두 작업을 묶는 키워드는 ‘기술’이다. ‘기술의 발전’과 ‘사건을 건조하게 인지하는 능력(객관적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여기에서는 ‘건조하게≒객관에 가깝게’ 일 듯하다.)’은 점차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까.

어려운 질문이다. 미래를 예측한다기보다는 상상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중세와 근대를 거친 일반인들의 교육 수준과 판단 능력에는 과학적인 요소가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다. 시간이 흘러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과거보다 나아진 것 또한 (건조하게) 사실이다. 민주주의 내에서 사건을 인지하는 능력은 곧 공동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 공동체 내의 갈등이 심화하는 건 IT를 바탕으로 하는 소통 기술이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팩트와 날조가 혼재되어 선동하는 일은 비단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만은 아닐 테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사건을 건조하게 인지하는 능력’이 불필요해지는 지점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진정한 노동의 종말이 찾아오고, 인간에게 적절한 판단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도 달라지지 않을까. 오늘날 강인한 신체 능력과 지위 상승이 비례하지 않는 것처럼. 아! 이미 변화는 시작되지 않았나. 구텐베르크 시대부터 내려온 글에 능한 사람보다, 카메라 앞 능변가가 더 주목받는 요즘이다.


작가의 작업은 시대를 대변하는 작업일까, 아니면 특정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의의가 있을까. 연장선에서, 작가가 바라보는 기술과 생각의 관계는 무엇인가.

작업이 현실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 작업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형식에서 보이는 차가움이 현실의 뜨거움 혹은 급박함과는 멀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좇는 것은 ‘생각의 유통과 변화’다. 예를 들어, 천연가죽은 왜 점점 합성 가죽으로 대체되고 있을까 같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문제들을 바라보면 정말 신기하다. 더 나아가, 현재의 상식이 미래의 야만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때 답답함을 느낀다. 보편적인 생각과 그렇지 않은 생각을 가르는 행위는 참으로 어렵다. 익숙한 것이 옳은 게 아니라, (시대 구조에 적합하기에)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평범한 농민이 성 소수자를 위한 인식 전환을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을까.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의 힘이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2021. 06]




정영호 무엇이 시대의 생각을 바꾸고, 사회적 규범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업 기저에는 ‘기술의 발전이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치관을 세운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www.jeongyoung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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