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현
낭만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장의 사진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사진으로 전할 때는 극적인 형식, 다시 말해 긴장감 넘치는 구성이 효과적일까, 아니면 잔잔하게 어쩌면 무덤덤하게 사건을 읊조리는 방식이 적절할까. ‘염전 노예 사건’을 주제로 하는 하승현의 <The Pale Red Dot>과 <Salt Pond>는 ‘사회와 미디어의 비판적 프레임 안에서 무책임하게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단순 ‘보도’를 뛰어넘어, 개인의 인지 변화가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길 바라는 바람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담긴 하승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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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e Red Dot>과 <Salt Pond>의 모티브
1990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태양계로 나간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촬영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지구를 푸른색 점처럼 기록한 사진을 보고 집필한 그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은 당시 인류에게 일종의 ‘바니타스(Vanitas, 삶의 덧없음을 상징)’를 전했다. 비슷한 원리로 ‘Pale Blue Dot’에서 모티브를 얻은 <The Pale Red Dot>은 ‘관점에 따른 인지 변화’를 의미한다. 작업 주제는 섬마을에서 지적장애인들을 염전 노예로 삼은 ‘염전 노예 사건’이다. 염주들은 인부들에게 ‘붉은 바지’를 입혔는데, 이는 인부들이 도주할 시 멀리서도 눈에 띄게 하는 장치였다. 작업에서 나는 ‘붉은 바지’를 사건의 상징으로 정하고, 우주로 나간 ‘보이저 1호’의 카메라처럼 드론을 이용해 대상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었다. 이를 통해 작은 점으로 수급되었음에도, 식별이 가능한 ‘붉은색’이 염전 사건의 폭력과 비극을 역설하기를 기대했다.
반면, <Salt Pond>는 비정상적인 형태를 띠고, 다양한 색과 텍스처를 지닌 염전들을 관찰하면서 시작된 작업이다. 대부분 관리가 되지 않은 염전들로, 찢어진 장판, 철거되고 남은 흙, 자라난 잡초 등이 새로운 색을 만들어냈다. 이는 ‘염전 노예 사건’ 이후 많은 염전이 기계화되었는데, 기계를 구매하지 못하거나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한 염전들이 ‘태양열에너지 업체’에 매각돼 방치된 것에서 기인한다. 염전이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판단, 염전의 표면을 강조한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
분명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염전 작업은 패턴(≒모호함)이 전면에 드러나는 까닭에 맥락이 단번에 읽히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 형식과 태도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작업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다.
사실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추측건대, 더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라는 불가능한 신화를 신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The Pale Red Dot>은 다큐멘터리를 부정하기 위해 선택한 작업 방식이다. 작가가 실제로 일어난 비극을 재현할 때는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피해자를 시혜적인 시선으로 소비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창작자가 이러한 대상화를 피하고자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관망하는 듯한 태도로 작품을 표현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소극적 개입은 보는 이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기록의 가치, 아카이브 등의 의미로 에끼는 경우가 잦다. 작업에서 ‘색면 추상화’ 형태를 빌린 것은 보는 이의 시선을 머물게 할 일종의 ‘대안적 스펙터클’을 위한 시도였다. 다만, 매체에는 관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사진은 어쩔 수 없이 실제에 기반을 두기에 <Salt Pond>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도하진 않았지만, 작업과정에서 다큐멘터리 성격을 일부 반영하게 되었다.
위의 질문에 이어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레이어 뒤에 숨긴 작업의 경우, 즉 도큐먼트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 작업이 말하는 것과 읽히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 관점에서 의도와 해석이 일치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자의적인 이미지 읽기가 더 중요할까.
작가 의도와 해석이 일치한다면, 예술이 가진 의미는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선배 작가들이 ‘확장성’을 거듭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 의도를 명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평이라는 것이 규정인 동시에 확장인 것처럼, 작가가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고 해서 보는 이가 그것을 온전히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보는 이에게 작업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고,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를 읽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으로 쉽게 잊히는 현실들을 좇으며, 흐릿해진 근과거를 재소환하고 문제시하기 위해 작업에 장치한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The Pale Red Dot> 속 붉은 점은 보는 이가 ‘월리를 찾아서’처럼 찾으려고 애를 써야 인지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면 다소 모호한 추상의 형태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속에는 항상 누군가의 비극이 존재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볼 수 없음을 비유하고 있다. ‘염전 노예 사건’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비극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은 늘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도록에 게재된 박지형 큐레이터 글에는 ‘사진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프레임 안에 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수용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생각과 실현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처음에는 르포르타주(Reportage) 형식의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풍경은 가는 동안 생긴 편견이 무색하리만큼 평화롭고 정 많은 시골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비극처럼 보이는 사진(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마치 그 장소와 고된 염전 노동 행위 ‘자체’를 비극으로 규정짓는 듯한 이미지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2018년 7월, 나와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혼인을 빙자하여 지적장애인을 노예로 부린 염주가 적발되는 일이 일어났다.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현장에 갔지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력함을 느낀 그날 이후부터 내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르포르타주 형식이 아닌, 지금과 같은 작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오늘날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이미지들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시대를 대변하는 작업일까, 아니면 특정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의의가 있을까.
시대를 바라보는 다소 ‘협소한’ 나의 관점에서, 내 작업은 시대 흐름과 정반대에 놓여있다.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말해왔지만, 최근 들어 그 경향이 더 심화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3D, VR, 딥페이크 같은 기술의 발전에 비해 더딘 제도와 윤리의식의 재정립이 현재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인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사진을 더는 사진이라 부르지 않고, ‘이미지’라 명명하는 작가들이 늘어나는 일,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우리를 현혹하는 이미지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작업 등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The Pale Red Dot>처럼 실재를 촬영하지만, 역으로 실재와 거리를 만들고 격차를 벌리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대를 대변하는 작업과 특정 내러티브를 만드는 작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다만, 가장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은 특정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법론이다. 홍진훤 작가와 안소현 큐레이터가 스펙터클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는 <사진에 관한 대화>라는 책이 있다. 안소현 큐레이터의 말을 빌리자면, 고전적 스펙터클은 힘의 관성처럼 ‘더 큼’을 원리로 그 방향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다. 어쩌면 이 같은 이유로 전형적인 스펙터클은 효과적이지 않을지라도 영원히 유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홍진훤 작가가 정의한) ‘대안적 스펙터클’은 그 방식이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수명이 짧다. 이 방식은 관객이 내성에 대비하여 거대해질 수 없다. ‘대안적 스펙터클’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관객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래서 이 방법론에 관한 연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21. 06]
하승현 ‘사회적으로 쉽게 잊히는 현실들을 좇으며, 흐릿해진 근과거를 재소환하고 문제시하는’ 작업을 한다. 2020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 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돼, SeMA 창고에서 개인전 <The Pale Red Dot>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