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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Nov 04. 2021

(불)친절한 찬욱씨

박찬욱

현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는 영화감독 박찬욱의 사진전 <너의 표정 Your Faces>(~12.19)이 진행 중이다. 전시 소개글을 쓴 씨네 21 김혜리 편집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너의 표정>은 스토리텔링의 구속에서 풀려난 이야기꾼의 사진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아름답고자 하지 않는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 미의 범주를 반문’하는 박찬욱의 사진들을 만나보자.


<Face 3>, 2013, Digital C-print, 111x111cm(여백 포함)


박찬욱의 사진은 친절하다. 심오하고 복잡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완벽하게 묘사하는 박찬욱표 영화와 달리, 그의 사진은 소박하다. 씨네 21 김혜리 편집위원의 말마따나, 박찬욱의 사진은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순간조차도 인공적으로 디자인해서 꾸며 내야 하는 영화의 숙명에서 벗어난 모양새다. <너의 표정>을 수놓은 피사체들은 ‘메이킹필름’의 프레임을 연상케 한다. 어떤 이벤트가 벌어지기 전, 영화에 비유하자면 슛 사인이 떨어지기 직전, 긴장감 혹은 설렘 가득한 인물의 표정과 닮은 까닭이다. ‘배우도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친근함마저 느끼게 되는 그런 표정. 이는 최종 결과물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찰나의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내 무언가를 말할 것 같은, 그가 포착한 피사체의 얼굴은 사진과의 첫 만남을 호감 있게 만든다. ‘스타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에 씌워진 관념이 무색해질 정도로.


박찬욱의 사진은 불친절하다.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있는 그의 영화처럼, 으레 감각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사진 속에 숨어 있을 것 같지만, 사진들을 아무리 조합해도 내러티브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특정 이즘(-ism)’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여느 작업들을 배경 삼아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무책임하다.’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매력적이었던 첫인상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한다. 한참을 사진 속 피사체와 대면해 본다.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출발점을 알 수 없는 심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순간 전시장은 진실의 방이 아닌, 상상의 방이 된다. 단순하다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진을 통해 레이어가 켜켜이 쌓인 나만의 영화를 그려내고 있다니. 박제됐던 시간, 그때의 피사체가 내뿜었던 온도를 더는 괘념치 않으리라. 지금 이 순간, 박찬욱 사진 속 피사체는 우리의 지나간 날을,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날을 불러들이는 모멘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Face 85>, 2011, Digital C-print, 111x111cm(여백 포함)
<Washington, D.C>, 2013, Digital C-print, 111x111cm(여백 포함)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에선 다큐멘터리 사진에 집중했고, 영화감독이 되어서는 철저히 계산된, 만들어진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런데 <너의 표정>에서 공개한, 다시 말해 영화감독이 된 후의 ‘사진 작업’은 되레 대학 때의 ‘리얼리티’로 회귀한 듯하다. 시선의 변화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뉘앙스와 범위가 다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사진들을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웃음) 글 쓰는 사람,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1980년대 대학 분위기는 거의 모든 학생이 돌을 던질 정도로 ‘사회 비판적’이었다. 대학교 안에 전투경찰 한 부대가 상주하던 때였으니까. 시대상 영향도 있었겠지만, 본디 서강대학교 사진 동아리는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달동네 주민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비판적인 소재보다는, ‘동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찾는 데 집중했다. 넓은 범주에서는 영화 작품이나 <너의 표정> 속 사진이나 비슷한 듯하다. 판타지 영화를 만들더라도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든지.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구별하지 않고, 이들이 혼재되어 있거나, 추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찾아내려 한다든지. 추하기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볼품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내려고 하는 태도는 대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영화나 사진이나 일관됐다고 생각한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스러움’과 사진작가로서의 ‘박찬욱스러움’은 어떻게 다를까. 개인적으로 박찬욱의 사진은 영화에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기이함, 은유적인 것은 그대로 유지한 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견해를 듣는 것이 좋다. 사실 사진을 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있고, 몇 년에 걸쳐 다듬은 사상이 있으니까. 또한, 영화는 관객 마음속에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 상당 부분 의도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조종하기까지 한다. ‘지금 이 장면은 당장 이해되진 않지만, 조금만 참으면 어딘가에서 미스터리가 해결되겠지?’라는 생각에 수반되는 조마조마함과 인내심을 조종한다고나 할까. 반면, 사진은 본능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로 관객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매체다. 의도할 수도 없고,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복도를 찍은 사진(Face 85)을 본 관객 마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호텔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기하학적인 패턴에서 추상화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이것저것 설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진은 말이 얹힐수록 상상이 제한되는 듯하다.


연장선에서, 예전 인터뷰를 참고하면, 박찬욱 영화는 ‘아름다운 것과 윤리적인 것의 갈등’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는 이로선 ‘무책임한 사진’으로 다가온다. 사진이 모여 있음에도, 영화처럼 내러티브를 읽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에 작용하는 트리거. 내 사진은 내러티브를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자신만의 내러티브 구축이 가능하다. 어떤 사진 하나가 마음에 작용하는 트리거가 되면,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진의 우수함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훌륭한 작가의 작업도, 인터넷에서 떠도는 흔한 사진도, 사진 자체가 일으키는 기억과 상상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


<Face 107>, 2013, Digital C-print, 80x80cm / <Face 115>, 2012, Digital C-print, 124x124cm


‘절대 눈에 띄지 않는 순간’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보통 하나의 피사체를 2~3컷 찍고 끝을 낸다고 했는데, 컷 수에 비해 운이 좋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웃음)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놀랄 준비를 하고 있다. 집 근처를 산책한다고 예를 들어보자. 늘 보는 풍경인데 카메라를 내 몸에서 떼지 않는 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똑같은 계절, 똑같은 날짜라고 해도 매년 10월 1일의 풍경은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길거리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셔터찬스는 전적으로 본능에 맡긴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기 직전의 순간 같다. 왜 ‘너의 표정’일까.

보는 이의 아주 사적인 감정을 이끌기 위해, 또 이를 제안하기 위한 ‘초대의 의미’다. 다시 말해, 어떤 사진과 마주했을 때 피사체와 1:1로 대면하면서 ‘너의 생각은 이런 것이겠구나?’, ‘너의 감정은 이것이 아닐까?’하고 각자 상상해 보라는 뜻이다. 영화를 예로 들면, 긴 대사를 앞둔 배우의 표정, 즉 감정을 끌어올리는 순간의 흔적을 보는 걸 좋아한다.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펼쳐지기 직전의 모습처럼, 사진에서도 그런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극단적인 클로즈업, 원경이 없어서 그런지 사진에서 적당한 거리감이 감지된다. F4~5.6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거리감을 유지한다고나 할까. 또한, 인물 사진에 비유하면, 헤드룸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표준렌즈로 멀리서 찍을 것이냐, 아니면 가까이서 광각으로 찍을 것이냐. 프레임 속 피사체 크기는 같을지라도 거리감, 심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왜곡도 생길 수 있다. 어떤 렌즈로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볼 것이냐가 내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이서 봐도 안 되고, 너무 멀리서 봐도 안 되는, 그런 적절한 거리와 크기. 이를 선택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어렵다. 영화 현장을 예로 들면, 촬영감독이 생각하는 미디엄 샷과 내가 생각하는 미디엄 샷이 다를 때가 있다. 의견 조율을 통해 너무 다가가서 (불필요한) 과도한 몰입이 발생하는 것을, 너무 멀어져서 디테일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려고 한다.


<Face 106>, 2016, Digital C-print, 124x124cm(여백 포함)


미장센 이야기를 해보자. 박찬욱 영화의 특징은 지나가는 바람일지라도 철저한 계획에 따라 세팅하는 것이다. 사진촬영은 ‘본능적’이라고 했지만, 책과 전시는 미장센이 작동하는 듯하다. 포토북 <아가씨 가까이>의 레이아웃을 보면, 어두운 영화 주제와 달리 사진이 유머러스하게 배치되어 있고, <너의 표정> 전시는 완급조절이 돋보인다.

책의 레이아웃과 전시 디스플레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다. 이 방(인터뷰를 진행한 뷰잉룸)으로 쫓겨난 작품들을 보면 안타깝다. 수준이 떨어져서 밀려난 게 아니고, 전체 흐름에 맞추다 보니 전시장에 걸리지 못했다. 개별 작품도 중요하지만, 전시라는 것은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 또다시 영화에 비유하자면, 전체 흐름에서 하나의 신(Scene)이 어떻게 작동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신일지라도, 편집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전체를 봐야 한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전시와 책도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반복성, 지루함을 지양해야 하고, 병치했을 때의 활력도 고려해야 한다.


좁은 뷰잉룸을 감도는 긴장감이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걸 보니, 쫓겨난 건 아닌 듯하다. (웃음) 색감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윌리엄 이글스턴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사진 색감이 굉장히 야릇하다.

윌리엄 이글스턴 작업실에서 ‘다이 트랜스퍼 프린트(Dye Transfer Print)’를 직접 보고 황홀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전시장에서는 유리 반사 탓에 사진의 디테일을 감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옛날 코다크롬(Kodachrome) 필름으로 촬영하고, 다이 트랜스퍼로 인화해야 나오는 색감은 팝업북을 보는 듯, 입체감이 돋보였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이글스턴 색감을 완벽히 재현하는 건 어려운 듯하다. 나는 영화를 찍을 때도 구식이라서 여전히 ‘필름 룩(Film look)’을 고집하는 편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필름 촬영이 어렵고, 현상소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디지털로 찍고 있지만…. 작업 결과물을 보면서 ‘이만하면 만족한다.’라고 했다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예전 필름 영화를 보면 좌절하기도 한다.


<Face 6>, 2016, Backlit film, LED lightbox, 110x75cm(여백 포함)
<Face 16>, 2013, Backlit film, LED lightbox, 110x75cm(여백 포함)


<너의 의미>는 2012년부터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양의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엮어 공개할 예정인가. 더불어, 용산 CGV에서 전시 중인 사진들 주제가 박찬경 작업과 비슷하다.

용산 CGV에서 4개월마다 여섯 점의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모든 사진을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이 뭘까 고민하다가 ‘범신론’이라 했다. 동생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지만, 자연 현상에 영혼과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범신론’만큼 적절한 제목은 없는 듯하다. 아무래도 ‘범신론’과 비슷한 맥락으로 10년 넘게 작업해왔으니 그럴 수밖에. (실제로 용산 CGV에 전시된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피사체가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기회가 된다면, 뮤지엄을 돌아다니며 기록한 사진, 영화 현장에서 포착한 배우들의 꾸밈없는 표정도 공개하고 싶다.


영화감독이 법인사업자라면, 사진작가는 개인사업자라고 할 수 있다. 두 직업에서 느끼는 마음이 궁금하다.

영화는 수백 명의 스태프가 함께하는 ‘집단 예술’이다. 여기에 거대 자본까지 더해진다. 나는 영화감독이자 프로듀서다. 고용 감독이라면 투자자와 직접 만날 일이 드물겠지만, 나는 두 역할을 겸하고 있어 무거운 책임감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다. 실감이 나지 않는, ‘0’이라는 숫자가 주렁주렁 달린 엄청난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그리고 이를 회수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투자자를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성의를 갖고 노력하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투자자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서는 투자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투자자가 원하는 건 자신의 입맛이 아닌, 대중의 입맛을 맞추는 것이다. 반면, 사진은 자유롭다. 혼자서 길거리를 거닐며 찍을 수 있으니까. 조명을 들어주는 어시스턴트도 필요 없다. 오늘 결과물을 얻지 못했더라도,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 가져도 된다. 다만, 이제 상업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었으니, 또 다른 부담이 생긴 건 사실이다. (웃음) [2021. 11]


                                          (이미지 제공 = 국제갤러리,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Face 94>, 2013, Digital C-print, 80x80cm(여백 포함)


어쩌면 풍경이고 정물이고 간에 모든 사물을 초상사진 하는 기분으로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피사체가 되신 그분의 신분과 성격, 삶의 역정, 지금의 기분과 표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내가 세상 만물과 나누는 대화의 방식이 이러하다.
-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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