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콘텐츠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속 “마음을 안 주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라는 대사가 유행하던 시절,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많은 남자가 열변을 토했는데, 정신적 사랑이 물질적 사랑보다 앞선다는 관념이 사랑의 정석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순정이 될 수도 있음을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깨달았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라는 가사는 얼핏 듣기엔 애절하지만, 현실이라면 매서운 눈초리를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럼 알바라도 해!”라는 외침과 함께 말이다. 이에 관해 대다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질이 받쳐주는 정신적 사랑이 백년해로의 길이라고.
지금부터는 경제적 면을 배제하고 사랑 그 자체를 파고들어보자. 이를 위해 예전에 쓴 글 일부를 빌려오고자 한다. ‘사랑의 재개발’을 부른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싹 다 갈아엎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비 하나 날지 않던 나의 가슴도 재개발해달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 쿨병에 걸린 사람에겐 한심해 보일지라도 지나간 사랑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마음속 자그마한 방에 숨겨두는 것이 보통의 연애가 아니던가. MSG 워너비 김정수(김정민) 또한 ‘애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네가 있던 그 자리엔 누구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발칙하게도 유산슬은 그대 맘을 심으면 뭐든 피어나 팥도 나고 콩도 나니 자신을 얼른 뉴페와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고 한다. 아무리 유행가라지만 마음속 구조물을 해체하고 인테리어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환승 출사표가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에겐 영 탐탁지 않다.
이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문화 예술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사랑’이다. 강인욱(소지섭)과 정재민(조인성) 사이를 오가는 이수정(하지원)을 그린 <발리에서 생긴 일>은 21세기 초반의 드라마요, ‘사랑의 재개발’은 불과 3년 전 노래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20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사회상만 달라졌을 뿐 사랑은 흔해 빠진 소재다. 2022년이라고 다를 건 없다. 갈아타기라 쓰고 인스턴트 사랑이라 읽는 동시대 흐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콘텐츠가 최근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MZ 세대의 끌림 문화를 분석한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최성호 지음, 필로소픽 펴냄)이 있다. 저자는 썸타기가 연애와 사랑으로 발전하려면 자신의 의지를 확정하는 결심이 필요한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 원인으로 유튜브나 SNS가 개인의 일상으로 자리 잡으며 도래한, ‘가짜 뉴스’와 ‘뇌피셜’ 같은 신조어로 대변되는 탈진리(post-truth) 시대를 꼽는다. 다시 말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문화의 등장으로 인간에 대한, 자신에 대한 냉소주의·허무주의·회의주의가 MZ 세대에 만연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나를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의 연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니 진지한 만남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이런 세태와 정반대 콘텐츠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제르바이잔의 대표 시인 니자미 간자비가 쓴 <레일리와 메즈눈>(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이다. 가문 싸움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게이스와 레일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책은 셰익스피어보다 400년 앞선 페르시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븐 살림이라는 부자와 억지로 결혼하게 된 부유한 족장의 딸 레일리. 이슬람 율법이 엄격한 중동에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는 남편을 거부한 채 게이스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게이스 역시 메즈눈(미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레일리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병을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레일리와 게이스는 잠깐 재회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예상하다시피 죽음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질곡의 삶일지라도 진정한 사랑만이 고귀한 희생을 할 수 있고, 숭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클래식한 사랑의 정수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레일리와 메즈눈> 동일 선상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는 맨해튼의 백인 청년 무리 제트파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집단 샤크파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남녀의 사랑을 그려낸다. 게이스와 레일리가 그랬듯,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속 청춘 남녀도 주어진 운명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랑과 용기를 키워나간다. 작금의 끌림 문화와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 영화지만, 얼마 전 열린 제79회 골든글로브(Golden Globe)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받은 점이 퍽 흥미롭다. 추측하건대, 종착점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사랑에 뛰어드는 청춘의 무모함이 대중의 심금을 울렸으리라.
연모지정에서 출발해 미묘한 관계로 이어지는 계보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우리를 두근거리게 하는 사랑에 관해 고민해 볼 시간이다. 현재 디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10월 30일)는 사진·영상·일러스트레이션 등을 통해 다채로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하는 전시다. 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순간부터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애타는 마음, 열병을 앓던 뜨거운 나날, 희미해진 기억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꽤 간간하다. 내용이 다소 오글거릴 수는 있으나 전시장을 나서면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그것이 가능한지 스스로 질문하는 등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자칭 연애 분석가들은 요즘 사람들을 두고 진정한 사랑을 꿈꾸지만, 막상 진정한 사랑이 다가오면 겁을 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적당히 사람을 찾고, 적당히 만나다 적당히 갈아탄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앞서 소개한 책과 영화, 전시를 보고 나니 분석가들의 ‘적당히’란 단어를 곱씹어 보게 된다. 로맨스에 절대적 숭고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다지는 일은 철저히 개인적인 부분이기에 제삼자가 높고 낮음을 가늠하는 일은 월권에 가깝다. 상대의 어떤 면을 보고 선택했느냐는 개인의 책임이다. 그 끝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결국, 종합해 보자면 상처받는 게 두렵겠지만 나를 알고자 노력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직진하는 자세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의미와 가치가 아닐까 싶다. 이는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좇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을 대하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2022.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