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지난 4월 18일, 중환자실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한량 같은 아빠는 술을 좋아했다. 그 좋은 술을 마시고는 왜 그렇게 가족을 괴롭혔을까
주폭, 가정폭력 특별 단속 기간에 술을 마신 아빠가 의자를 던지고 엄마를 폭행했다. 나는 112에 신고 했다. 내가 어릴 땐 집안 일이니 가족끼리 잘 해결하라던 경찰도 눈 앞에서 폭행하는 아빠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집안일은 바깥일로 번졌다. 회사에서 일 하고 있는 데, 외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변호사삼촌은 아빠를 선처하라고 하셨다. 나는 싫다고 했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셔서 내가 왜 가족에게 이러냐고 되물었다. 후에 그 날 일을 증거로 쓰려고 찍어둔 동영상을 남자친구가 컴퓨터로 발견하고 봤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아빠는 내 삶의 깊은 상처였다. 아주 깊은 동굴같아서 그 속에 갖은 감정의 쓰레기들이 어둠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후에도 그렇게 아빠는 내 삶에 쌓은 미움을 잔뜩 안은채로, 지난 4월 18일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았다. 4월 13일 한나가 아파서 등원을 하지 않았다. 한나를 데리고 친정에 갔더니 아빠가 체한 것 같다고 하셔서 엄마와 병원으로 갔다. 전화가 와서 데리러 오라는 줄 알았더니 내과에서 쓰러진 아빠는 119로 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아빠의 찢어진 옷가지를 챙기고 병원에서 사오라는 준비물을 몇 가지 샀다. 기저귀를 고르다 울컥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도 혼자 못 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중환자실에서 아빠에게 인사를 하라는 말에 아빠를 만나러 들어갔다. 아빠는 나를 보고 울었다. 마지막 농담은 아빠 나한테 미안한 게 많구나! 였다.이 말이 마지막일줄은 나는 전혀 알지 못 했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정말 아빠가 이 세상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몸이 커서 관뚜껑을 닫지 못 하고 태운 아빠의 뼈를 부셔 담을 때, 그 뼛가루를 흙에 섞어 수목장에 묻었을 때에도 아무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를 묻고 돌아오는 길, 집으로 가는 운전석에서 바라본 세상은 며칠 전과 너무나도 변한 것 없이 똑같아서 새삼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아빠가 너무 미웠다. 줄곧 아빠가 없으면 좋을 것만 같았다. 서운함은 49 쯤, 홀가분한 마음은 51 정도 될 것 같았다. 철이 없어서 그럴 줄 알았는데 아빠가 정작 돌아가신 후 나는 깊은 우울과 상실에 뒤덮였다. 문득 떠오르는 순간의 기억들로 밤에 두 아이를 재우고 눈물을 흘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움과 그리움은 동전의 양면이었던건가
상실과 부재감으로 인한 나의 마음이 깊은 동굴을 헤뒤집어 이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깊은 데 쓰레기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 속에 반짝이는 기억과 추억이 섞여있었다. 아빠를 좋아했던 내 어린 날들의 기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었구나 하는 마음을 받아들였다. 이제 아빠는 세상에 없지만 내 마음과 기억이 나를 감싸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족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존재라 했다. 내게 원가족은 때때로 그랬다.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었던 나의 가족. 하지만 잃고나니 깊이도 그리운 사람
아빠가 많이 보고 싶다. 있을 때 잘 하라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있을 때 잘 할 수 있는 게 모두가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없어지면 그리울 것이라는 장담만은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 날 중환자실로 돌아간다면 아빠에게 내가 아빠를 많이 사랑했다고 말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