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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는 존재의 증명

효연 산문 15

by 박효연

부재가 잇따를 때 존재의 증명이 완성된다.


시몬 드 보부아르에 따르면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더 좋아하기 위해서 그것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근본을 관통하는 말이다. 어디에든 잘 어울렸던 티셔츠가 보이지 않을 때 애달파 보고 간절해 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티셔츠는 본래의 가치보다 더 높이 평가되며 없어서는 안 되는 단 하나가 된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부재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것이다.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형, 유색, 유취라도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무형의 무언가이다.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재가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재라는 것. 즉, 존재한다는 뜻이며, 상실을 겪어야만 실존 가치는 증명이 된다. 이로써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것이 귀중했다는 것임을 또, 유일무이했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현대인들은 빈자리와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에 존재의 귀중함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룰 줄 모른다. 일천구백 년대의 시와 현대의 시를 비교해 봤을 때 그 애달픔의 깊이가 다른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상실을 온전히 다 겪기 전에 수많은 대체제들을 이고 지며 빈자리를 채우고, 화면으로 빠져들어 감정을 속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무엇이 중한 것인지 사소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된다.


인스턴트 시대라고 해도 마음의 깊이가 3분짜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오뚜기 3분 카레처럼 금방 데워지고 쉽게 식어버린다.


쉽고 간단하게 이어지는 인연에 진심은 곡해되고 그것에 대한 가타부타가 귀찮아지며 냉소적임이 멋져지는 세상 속에 무엇이 진심인지 어떤 게 귀한지 알지 못하니 만남과 헤어짐이 얄팍하고 덧없다.


현대인들의 덧없고 얄팍한 감정을 비판하지만 나 또한 쉽게 그렇게 되어버린다. 진심을 다하면 그 크기만큼 내게 돌아오는 감정 리스크가 크고 그것을 이겨내기에는 난 유약하니까.


어쩌면 모두가 유약하기에 덧없고 얄팍한 만남을 하는 척 그 진심을 명치 아래 어딘가 꼭꼭 숨겨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지질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 앞에 지질해지는 행위는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나는 안다.


함부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멋대로 가벼이 판단하는 사람을 보며 너는 한 번이라도 온 마음 다해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봤느냐며 따져 묻고 싶을 때도 많다.


다른 사람의 진심은 우스운 게 아니니까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주면 진심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맞다.


나에게 전해진 모든 마음이 감사하고, 내가 가졌던 진심이 자랑스러우며 지나가는 감정들이 소중하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내 배려의 대가로 받은 시혜의 감정이든 어떤 형태이든 간에 모조리 값지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온 마음 다해본 적 있는가? 부재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상실의 심도를 탐구해 본 경험이 있는가? 존재의 가치를 위해 앓아 본 경험이 없다면 쉽게 진심을 논할 자격이 없다.


당신들의 마음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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