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성 디자이너

(1) 물경력?디자이?너

by 희윤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처음 받고 1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고비가 너무 많았지만 이 일이 좋아서 어쩔 수 없더라구요. 보통들 많이 들었을 이야기이고, 저도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10년만 버텨라.'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면 된다. 버티는 사람이 승자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열정이 차오르는 듯한 멋진 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10년이 다가오는데 저는 그냥 속 빈 강정같은 존재라면요? 난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는데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요?


디자이너란 대체 뭘까요? 세상에 디자이너는 너무 많은데 분야는 제각각입니다. 저는 출판사에서 시작해 경력을 쌓아온 편집 디자이너입니다. 제게 Adobe Indesign과 Photoshop, Illustrator는 너무 당연한 도구인데 누군가에게 Indesign은 외계문명 같은거죠. 어떤 사람에겐 당연한 도구가 Figma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C4D일 수도 있습니다. CAD는 또 어떻구요...? 그래서 누군가는 편집 디자이너, 다른 사람은 프로덕트 디자이너, 영상 디자이너, UI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 등 정말 다양한 업계에서 다양한 디자이너가 디자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에서 디자인을 검색하니 위키백과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디자인(design, 문화어: 데자인)은 동사와 명사로 함께 쓰일 수 있으며, 명사로서의 디자인은 다양한 사물 혹은 시스템의 계획 혹은 제안의 형식 또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안이나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결과를 의미하며, 동사로서의 디자인은 이것들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뭔가를 만드는 사람인거죠...? 분명 디자이너로서 회사 업무에 맞춰 계획을 세우고 물품을 만들어냈는데 누군가는 오퍼레이터나 툴러라고 불리고 있어요. 오퍼레이터는 공장 같은 곳에서 생산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을 뜻하고, 툴러는 프로그램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기획력이 없고 남들 다 유튜브 보고 조금만 하면 따라하는 기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로 취급되죠.


어라, 정신차려보니 나 오퍼레이터 취급 받고 있네?
난 분명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디자이너가 된 거였는데,
디자이너가 아니었단 말이야?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정말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근데 이게 제 현실이더라구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모르겠구요. 사실 저도 모릅니다. 제가 겪은 건 출판편집디자인 뿐이었고 다른 업계 상황은 알지 못해요. 내가 원해서 사수 없는 회사에서 구른 것도 아니고, 일할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해온 것 뿐인데 좀 억울하더라구요. 억울해도 어쩌겠어요.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저는 디자인을 못하는 물경력 오퍼레이터였어요. 근데 지금까지의 경험이, 앞으로의 경험이 소위들 말하는 물경력으로 끝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든 생각이 그 물경력 안에서 배운 것을 정리하고 앞으로도 일을 해나가기 위한 원동력을 만들고 싶었어요. 전 이 일을 좋아하고 디자이너를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물경력이라는 생각이 들 때 물경력보다는 그냥 물속성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고여있으면 고인물이 되지만 흐르면 언제든 맑은 물이 될 수 있고 앞으로의 길을 개척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겪어온 고민을 쓰고 누군가 같은 고민을 했다면 위안이 되었으면 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도 커리어가 아닌 공감에세이를 선택했어요. 누군가를 이끌 수는 없지만 고민을 나눌 수는 있을 거 같더라구요. 전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실력이 훌륭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10년 이상 업계에 발끝이라도 담그며 지내왔고 버텨왔습니다. 근데 그 10년으로 어떤 사람은 누가 봐도 멋진 작품을 만드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지만 저는 아니더라구요.


유명해지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도 열심히 살았는데 저라도 인정해줘야지 싶었어요. 10년을 버텼는데 정말 버티기만 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담아 페이지를 채워보려고 합니다. 오퍼레이터로 만족하지 못하고 내 디자인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분명 있잖아요.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조금이라도 빨리 회사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잡고 앞으로도 디자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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