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친정엄마, 그리고 나의 공통점
“미리미리 예약해야지!”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양가 어른들의 ‘돌잔치 예약’ 성화가 쏟아졌다. 첫째의 생일은 1월인데 말이다.
“뷔페에서 안 할 건데요”
이 한마디로 다시 시작되었다. 설득인지 선언인지 애매한 입씨름의 시간. “병원에서 안 낳을 건데요”에 이어 두 번째 입씨름이다.
“제발 남들 하는 데로 하고 살아라”
또 그 말을 듣고 말았다.
나는 뷔페 음식을 좋아해서 ‘뷔페 돌잔치’에 초대되는 일이 즐겁다. 잔치 주인공의 성장 영상을 보며 눈물 훔치는 푼수끼도 있고 상품을 건 퀴즈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막상 잔치 주인공을 보면 좀 애잔하다. 불편한 옷을 입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 품을 전전하다가 결국 울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를 위한 돌잔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의 돌을 앞두고 남편은 그동안 뿌린 봉투를 회수한다는 의미로 뷔페 돌잔치를 하자고 했다. 나도 어른들과 입씨름하는 게 싫어서 이번엔 지는 척, 남들도 다 하니까 뷔페 돌잔치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한테서 발생했다.
‘어떻게 낳은 아인데...!’
남과 다른, 조금 더 특별한 돌잔치를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이 불쑥 올라왔다. 당연히 뷔페는 최고급. 벌써 5년 전이건만 호텔 뷔페 디너타임은 7만 원 선이었다. 사회자를 쓰지 않고 부부가 직접 진행, 손수 포장한 답례품을 드리되 축의금은 받지 않는 걸로 나는 마음을 정했다.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하자 남편은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뷔페에서 하는 게 정말 싫구나”
내가 어깃장을 놓기 위해 일부러 비싼 장소를 섭외하고 축의금을 거절하려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우린 집에서 상을 차리고 양가 어른들만 불러 돌잡이를 하는 걸로 돌잔치를 마쳤다. 양가 어른들은 당신들의 뜻에 한 번도 “네”한적 없는 우리 부부를 반 인정, 반 포기하신 듯했다.
돌잔치에 청하지 않은 친인척들께는 남편이 돌떡을 전하며 축하를 받는 걸로 대신했다. 그 시간 첫째는 내 젖을 물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 분주한 하루였어’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말해주었다.
돌잔치를 뷔페에서 하든, 집에서 하든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의 욕심에 따라 큰돈을 쓰느냐 마느냐가 돌잔치라고 생각했다.
둘째 돌잔치 때는 양가 아무도 ‘뷔페’ 말씀이 없으셨다. 돌날 음식 몇 가지 해서 어른들을 초청해 밥을 먹고 돌잡이를 했다.
첫째 때는 돌잡이 용품을 대여했는데 막상 아이가 잡은 건 상에 놓인 무지개 떡이었다. 어른들이 떡을 뺏고 돌잡이 용품을 아이 앞에 갖다 대자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양손에 떡을 쥐어주는 걸로 아이를 달랬다. 3만 5천 원이나 주고 대여한 돌잡이 용품은 고스란히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둘째 때는 돌잡이 용품 대신 유명인들 사진을 코팅해놓고 집어보라고 했다. 아이는 ‘유시민’을 집었다. 김어준이나 법륜스님을 집을까 노심초사하시던 어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둘째 때도 첫째와 마찬가지로 남편이 돌떡을 배달하고 나는 아이들과 집에 있었다. 첫째도 둘째도 금세 잠이 들고 하루 종일 음식을 준비한 나도 몹시 피곤해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누구를 위한 돌잔치인가’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잔치를 뷔페에서 하지 않았다고 아이를 고단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빈대떡부터 갈비찜, 수수팥떡까지 직접 만드느라 놀아달라는 첫째를 외면해야 했고 잠이 안 온다는 둘째를 계속 업어야 했다.
“애들 있는데 음식까지 하느라 참 애썼다.”
“애 있는 집이 어쩜 이리 반질반질하니?”
나는 칭찬이 필요해 돌잔치를 이용했나 보다. 그 덕분에 아이들의 하루가 고단했다.
뷔페 돌잔치를 그토록 바라던 양가 어머니들은 전쟁 직후 자식 많은 집에 딸로 태어나신 분들이다. 두 분 다 돌잔치도 돌잡이도 없으셨다. 정규 교육도 받았다 말았다 하다가 20대 초반에 맞선으로 결혼하셨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 중 하나의 모래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얼마의 돈이면 음식이 산더미같이 쌓인 뷔페에서 자식과 손주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할 수 있는데 그걸 자식들이 마다하다니!
‘남들도 다한다. 남들처럼 살아라’ 라는 명목으로 손주의 생일 축하와 기념을 위한 최선의 제안을 해주셨는데 머리 굵은 자식들은 “그거 다 상술이고 민폐예요” 하고 싹뚝! 잘라버렸다. 출가시킨 자식의 옳은 말에 외마디 반박도 못하신 어머니들은 ‘남들처럼’, ‘남들처럼’을 반복하며 물러나셔야 했다.
돌잔치를 할 거면 최고로 해주고 싶다던 나도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돌잔치를 못 해봤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3년 연속 딸이 태어난 집안에 또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백일사진, 돌사진 등이 없는 건 당연하다. 내다 버리지 않고 키워주셨음에 감사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내 안에는 ‘내 자식만은 나와 다르게 최고로!’라는 초라함이 있었다. 손님이 다녀간 거실에 치울 거리를 바라보니 내면의 초라함이 나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돌잔치를 못해본, 탄생을 축복받지 못한 세 여자가 손주와 자식의 돌잔치에 신경을 듬뿍 썼다. 세 사람 모두 생각이 조금씩 달랐지만 아이가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였다. 끈끈하고 진한 핏줄로 이어져 있음이 처음으로 감사하게 여겨졌다.
참 다행인 것은 두 번의 돌잔치를 통해 나의 유치함을 마주하고 이제는 숨기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또한 양가 부모님이 우리 부부의 육아방식을 완전 포기하신 것도 성과다.
결국 다 내리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형태가 어떻든 돌잔치에 신경 쓰는 마음도 자식을 지지해주는 믿음도 결국엔 다 사랑이다. 양가 부모님이 그러하셨듯 머리가 굵어지는 자식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최선으로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