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은 Jan 06. 2020

기억할게요. 당신의 지금도




 어릴 때, 동네 뒷산에 작은 운동시설이 생겼다. 매미가 쉼 없이 울어대던 어느 여름날 그늘 진 철봉에 앉아 있던 잠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밥 먹자!”

 나를 찾으러 오신 할머니의 음성에 나는 깜짝 놀라 철봉을 쳤고 잠자리는 날아갔다.

 “으앙!”

 눈물이 터진 건 왜였을까?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할머니께 손가락 두 개를 쭉 뻗어 방향지시를 한건 왜였을까?

 ‘동네 오빠들처럼 손가락 두 개로 잠자리 날개를 잡고 싶은데 나는 못해’

 신통방통하게도 나의 울음 속에 숨은 언어를 이해하신 할머니는 예닐곱 살 된 남자아이에게 다가갔고 무어라 무어라 말씀을 하셨다. 남자아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졌자 대뜸 머리통을 쥐어박으시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자!”

 대여섯 살 된 나의 손가락에 예닐곱 살 된 눈물범벅의 오빠는 잠자리를 쥐어주었다. 그 순간 꼬리를 말아대는 잠자리가 얼마나 징그럽고 무섭던지.

 할머니는 내 팔목을 잡고 산을 내려오시며 혼잣말을 하셨다.

 “이거 다 내 아들이 만든 건데 버릇없게”

 갓 공무원이 된 작은 아빠가 시행한 공원사업 덕분에 잠자리는 철봉에 앉을 수 있었고 동네 아이들은 산을 누빌 수 있었다. 그러니 한대 쥐어박으며 잠자리를 뺏아도 당당한 할머니였다.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쎘다! 또 무척 건강하셨다.


 엄마 대신 내 유치원 입학식에 참석해주셨고 내가 초등학생 때는 4시간씩 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보러 와주셨다. 목청이 크고 손이 재빠르신 분. 나는 그때의 우리 할머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든든한 반쪽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풀 죽은 아이처럼 늘 기운이 없으셨는데 70세가 넘은 연세에 시누이에게 쌈짓돈 60만 원을 떼이고 북받치는 억울함에 실어증에 걸려 병원 생활을 하시며 팍! 늙어버리셨다. 곧이어 양쪽 무릎을 수술하신 뒤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셔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와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내 대학교 입학식, 졸업식에 못 오셨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다.


  오늘처럼,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뵙고 오는 날이면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고 먹먹하다. 그래서 난 할머니를 뵈러 가기 싫다.




 사실 난 할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할머니 어릴 때 살던 동네 가보고 싶지 않아?”

 “요양원 싫지? 집에 가고 싶지?

 책임질 수 없는 질문, 여여한 할머니 마음에 바람이 불게 하는 질문이 내 입가에 맴돌았다.

 우리 할머니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시대에 집안을 호령하는 암탉이셨다. 요양원에서 휠체어 타실 분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수년째 할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사진 좀 박아 놓고 가거라”

 할머니는 핸드폰을 내 손에 쥐어주시며 아이들 사진을 찍어두라 하셨다. 미리 사진을 좀 뽑아 갈 것을. 끝끝내 받지 않으신 용돈만 뽑아 간 내가 참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니라”

 지난번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시며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자주 찾아뵙지도 않는데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아이들 사진을 보신다니.


 그 순간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기력에 쇠한 지금의 할머니도 나의 할머니다.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살아낸 민중, 위인이 아니라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겠지만 내 마음을 언제라도 기쁘게,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추억 속 여인. 나는 영원히 기억하고 응원할 거다.


안**(여, 89세)

1930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신암리에서 태어나 19세에 소골(우물 2리)로 시집 감.

10남매를 낳았는데 5명은 어려서 죽고 현재 5남매를 두고 있음.

남편을 도와 장사(도매업)로 부를 이룸.

자손들에게 존경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뿌리 깊은 자존감은 바람에 아니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