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동네 뒷산에 작은 운동시설이 생겼다. 매미가 쉼 없이 울어대던 어느 여름날 그늘 진 철봉에 앉아 있던 잠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밥 먹자!”
나를 찾으러 오신 할머니의 음성에 나는 깜짝 놀라 철봉을 쳤고 잠자리는 날아갔다.
“으앙!”
눈물이 터진 건 왜였을까?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할머니께 손가락 두 개를 쭉 뻗어 방향지시를 한건 왜였을까?
‘동네 오빠들처럼 손가락 두 개로 잠자리 날개를 잡고 싶은데 나는 못해’
신통방통하게도 나의 울음 속에 숨은 언어를 이해하신 할머니는 예닐곱 살 된 남자아이에게 다가갔고 무어라 무어라 말씀을 하셨다. 남자아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졌자 대뜸 머리통을 쥐어박으시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자!”
대여섯 살 된 나의 손가락에 예닐곱 살 된 눈물범벅의 오빠는 잠자리를 쥐어주었다. 그 순간 꼬리를 말아대는 잠자리가 얼마나 징그럽고 무섭던지.
할머니는 내 팔목을 잡고 산을 내려오시며 혼잣말을 하셨다.
“이거 다 내 아들이 만든 건데 버릇없게”
갓 공무원이 된 작은 아빠가 시행한 공원사업 덕분에 잠자리는 철봉에 앉을 수 있었고 동네 아이들은 산을 누빌 수 있었다. 그러니 한대 쥐어박으며 잠자리를 뺏아도 당당한 할머니였다.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쎘다! 또 무척 건강하셨다.
엄마 대신 내 유치원 입학식에 참석해주셨고 내가 초등학생 때는 4시간씩 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보러 와주셨다. 목청이 크고 손이 재빠르신 분. 나는 그때의 우리 할머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든든한 반쪽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풀 죽은 아이처럼 늘 기운이 없으셨는데 70세가 넘은 연세에 시누이에게 쌈짓돈 60만 원을 떼이고 북받치는 억울함에 실어증에 걸려 병원 생활을 하시며 팍! 늙어버리셨다. 곧이어 양쪽 무릎을 수술하신 뒤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셔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와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내 대학교 입학식, 졸업식에 못 오셨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다.
오늘처럼,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뵙고 오는 날이면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고 먹먹하다. 그래서 난 할머니를 뵈러 가기 싫다.
사실 난 할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할머니 어릴 때 살던 동네 가보고 싶지 않아?”
“요양원 싫지? 집에 가고 싶지?
책임질 수 없는 질문, 여여한 할머니 마음에 바람이 불게 하는 질문이 내 입가에 맴돌았다.
우리 할머니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시대에 집안을 호령하는 암탉이셨다. 요양원에서 휠체어 타실 분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수년째 할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사진 좀 박아 놓고 가거라”
할머니는 핸드폰을 내 손에 쥐어주시며 아이들 사진을 찍어두라 하셨다. 미리 사진을 좀 뽑아 갈 것을. 끝끝내 받지 않으신 용돈만 뽑아 간 내가 참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니라”
지난번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시며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자주 찾아뵙지도 않는데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아이들 사진을 보신다니.
그 순간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기력에 쇠한 지금의 할머니도 나의 할머니다.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살아낸 민중, 위인이 아니라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겠지만 내 마음을 언제라도 기쁘게,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추억 속 여인. 나는 영원히 기억하고 응원할 거다.
안**(여, 89세)
1930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신암리에서 태어나 19세에 소골(우물 2리)로 시집 감.
10남매를 낳았는데 5명은 어려서 죽고 현재 5남매를 두고 있음.
남편을 도와 장사(도매업)로 부를 이룸.
자손들에게 존경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