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ttato della Pittura」제1장
<다빈치, 디자이너, 그리고 GPT>는 GPT를 활용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론, Trattato della Pittura」을 국문으로 번역하고, 그의 사유를 현대적 시각으로 탐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디자이너로서 다빈치와 문답하듯 그의 통찰을 재조명하며, 오늘날 디자이너의 역할과 맥락을 탐구합니다.
회화는 과학인가?
Se la pittura è scienza o no
과학이란 확고한 근본 원리에서 출발하는 정신적 탐구를 의미한다. 그 원리는 과학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연속적인 양(量)을 연구하는 기하학은 물체의 표면에서 출발하여 선(線)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선은 표면의 경계를 이루며, 여기에서부터 기하학이 시작된다.
Scienza è detto quel discorso mentale il quale ha origine da' suoi ultimi principî, de' quali in natura null'altra cosa si può trovare che sia parte di essa scienza, come nella quantità continua, cioè la scienza di geometria, la quale, cominciando dalla superficie de' corpi, si trova avere origine nella linea, termine di essa superficie;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선이 점(點)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점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기하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다. 점은 자연에도, 인간의 정신에도 존재하지만, 다른 어떤 요소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Ed in questo non restiamo satisfatti, perché noi conosciamo la linea aver termine nel punto, ed il punto esser quello del quale null'altra cosa può esser minore. Adunque il punto è il primo principio della geometria; e niuna altra cosa può essere né in natura, né in mente umana, che possa dare principio al punto.
어떤 사람이 펜의 끝이 종이에 닿아 생긴 흔적을 점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점이 아니라, 그 흔적을 둘러싼 표면의 일부일 뿐이다. 점은 그 중심에 위치하지만, 그 자체가 해당 표면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또한, 우주의 모든 점을 모은다고 해도, 그것들은 결코 표면을 구성할 수 없다.
Perché se tu dirai nel contatto fatto sopra una superficie da un'ultima acuità della punta dello stile, quello essere creazione del punto, questo non è vero; ma diremo questo tale contatto essere una superficie che circonda il suo mezzo, ed in esso mezzo è la residenza del punto, e tal punto non è della materia di essa superficie, né lui, né tutti i punti dell'universo sono in potenza ancorché sieno uniti, né, dato che si potessero unire, comporrebbero parte alcuna d'una superficie.
예를 들어, 천 개의 점으로 전체를 만든다고 상상해보자. 이 천 개의 점에서 일부를 떼어낸다고 해도, 그 일부가 전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증명되는데, '0'이라는 개념이 이를 보여준다. 산술에서 '0'은 'O'로 표기되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값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0'이 단위 숫자 뒤에 붙으면 10이 되고, 두 개가 붙으면 100이 되며,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0'은 개별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우주의 모든 '0'은 결국 하나의 '0'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E dato che tu t'immaginassi un tutto essere composto da mille punti, qui dividendo alcuna parte da essa quantità di mille, si può dire molto bene che tal parte sia eguale al suo tutto. E questo si prova con lo zero ovver nulla, cioè la decima figura dell'aritmetica, per la quale si figura un O per esso nullo; il quale, posto dopo la unità, le farà dire dieci, e se ne porrai due dopo tale unità, dirà cento, e cosí infinitamente crescerà sempre dieci volte il numero dov'esso si aggiunge; e lui in sé non vale altro che nulla, e tutti i nulli dell'universo sono eguali ad un sol nulla in quanto alla loro sostanza e valore.
어떠한 인간의 탐구도 수학적 증명을 거치지 않는다면 참된 과학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이가 인간의 정신 속에서만 시작되고 끝나는 학문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유 과정에는 경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험 없이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Nessuna umana investigazione si può dimandare vera scienza, se essa non passa per le matematiche dimostrazioni; e se tu dirai che le scienze, che principiano e finiscono nella mente, abbiano verità, questo non si concede, ma si nega per molte ragioni; e prima, che in tali discorsi mentali non accade esperienza, senza la quale nulla dà di sé certezza.
다빈치는 과학을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 즉 기하학과 같은 수학적 원리로 정의했다.
기하학은 점 → 선 → 면과 같이 최소 단위에서 시작해 더 큰 구조로 확장되는 체계를 통해 성립된다. 그는 회화 역시 이러한 원리를 따르기 때문에 과학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빈치는 과학이 단순한 이론적 사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경험적 증명을 통해 확실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화가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적 기반뿐 아니라 실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다빈치는 회화를 수학적 구조와 경험적 증명을 아우르는 과학적 활동으로 해석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대담은 GPT-4o를 활용합니다. 실제 과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철학이나 생각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할 수 있지만, 「Trattato della Pittura」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즐거움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나 | 레오나르도 선생님, 첫 대면이네요. GPT를 통해서지만, 위대한 거장과 대화할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먼저, 선생님께서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간단히 듣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에게는 선생님의 '회화론'이 유명하니까요. 저희와는 다른 시대를 사셨지만, 현대 디자이너들도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아, 반갑소. 먼 미래에서 내 생각과 대화가 연결될 줄은 상상도 못했소. 놀라운 시대를 살고 있구려. 자네의 말처럼 내 시대와 지금은 분명 다르겠지만, 나는 예술과 과학의 본질이 본래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믿소.
내가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로 끝나지 않소. 회화는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과학적 도구라 생각하오. 기하학적 원리,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 색채의 조화는 모두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된 것이오. 이 법칙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화라 할 수 있지.
하지만 회화가 단순히 보이는 것만 묘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감정, 움직임, 깊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를 표현하는 것도 회화의 중요한 임무라오. 이를 위해서도 철저한 관찰과 과학적 탐구가 필요했소. 나는 이 과정이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소.
현대 디자이너들도 이를 기억하면 좋겠소. '관찰'은 예술과 디자인의 시작이라오. 자연의 패턴과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하시오. 비록 자네 시대에는 나보다 더 다양한 도구와 기술이 있겠지만, 창조의 본질은 자연을 배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오.
나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회화의 과학적 본질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회화와 과학은 본질적으로 다른 목적을 가진 영역 아닌가요? 회화는 감정을 전달하고, 과학은 사실을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영역이 정말로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라 할 수 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날카로운 질문이오. 자네의 말처럼 회화와 과학은 목적이 다르지만, 나는 이 둘이 서로를 완성시키는 동반자라고 보았소.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도구이고, 회화는 그 진리를 구현하는 수단이라오.
내가 인체의 해부학을 연구한 이유도 과학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소. 근육과 뼈, 혈관의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사람의 몸을 자연스럽게 그릴 수 없었을 것이오. 이처럼 과학적 탐구는 회화적 표현의 토대라 할 수 있지. 반대로, 회화는 과학이 발견한 원리를 시각적으로 검증하거나 전달하는 역할도 할 수 있소. 내가 빛의 굴절이나 자연의 풍경을 그린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고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소.
하지만 자네가 말했듯, 두 영역이 혼동되어서는 안 되오. 과학은 논리와 증명에 기반하고, 회화는 감각과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소. 나는 이 둘이 서로를 도구로 삼아 더 큰 목적을 이루길 바랐을 뿐, 하나가 다른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나는 회화를 과학에 기반한 "창의적 실천"이라 부르고 싶소. 과학적 원리를 토대로 하되, 이를 초월한 감각과 해석을 담아내는 작업이라오. 자네도 아마 디자인 과정에서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물은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오.
결국, 회화와 과학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라 하겠소. 다만, 이 둘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공존할 때 비로소 최고의 창작물이 나올 수 있소.
나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창작의 본질은 '사고와 실천의 결합'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당시 사용하셨던 디세뇨(disegno)라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디자인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선생님께서는 디자인과 회화를 구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자네가 흥미로운 주제를 꺼냈구려. 내가 살던 시기에는 지금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정의되지 않았소. 하지만 디세뇨는 오늘날의 디자인과 유사한 역할을 했소. 나는 디세뇨를 단순한 그림 초안을 넘어 창작의 본질적 원리로 보았소. 디세뇨는 사고와 표현의 출발점이자, 예술과 공학, 건축을 잇는 다리 같은 것이었지.
디세뇨는 단순히 형태를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표현하는 지적 과정이라 할 수 있소. 그러니 디세뇨는 회화와 분리될 수 없는 근본적 요소였소. 하지만 회화와 디자인(디세뇨)을 구분하자면, 나는 이렇게 설명하겠소.
회화는 감정과 상징을 전달하는 예술적 표현에 가깝고, 디자인(디세뇨)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기능을 구현하는 도구라 할 수 있소. 예컨대, 내가 비행 기계나 군사 장비를 설계할 때는 철저히 기능적 목적을 따랐소. 반면,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를 그릴 때는 인간의 감정과 상징을 표현하려 했지.
결국 디세뇨는 창작의 공통된 뿌리라 할 수 있소. 자네가 디자인을 한다면, 디세뇨의 현대적 형태를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나 |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창작의 본질적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오늘날에도 표현과 문제 해결을 두고 다양한 디자이너나 예술가가 논쟁을 벌이곤 하는데요.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디자인의 의미를 좀더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그리하시오. 창작자는 자연과 인간을 관찰하고, 그 안에 숨겨진 법칙과 아름다움을 잊지 말아야 하오. 자네 시대의 작품들이 나의 시대와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 믿소.
나 |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대화는 저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