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을 읽었다.

by 벼랑끝

“비극의 탄생”을 읽었다.


고구마 만개를 먹은 것만큼 속이 불편하다.

하지만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

솔직히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이해됐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용납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반대로 말하면 “착한 사람은 그냥 착하다."는 거다.

쉽게 말해서 사람 나쁜데 이유 없고, 사람 착한데 이유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해도 착한 것이 아닌 게 되고,

‘나쁜 짓’도 나쁜 짓이 아닌 일처럼 포장된다. 법률의 잣대를 대면 더

오묘한 일이 생긴다.


저자인 손병관 기자는 '박원순 시장'의 사건을 ‘부메랑’이라 표현했다.

뭔가가 돌아와서 자신을 때렸다는 뜻이다. 내게는 그 말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가져온 ‘운명’이라는 말로 들렸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내 책이 나왔다고 박원순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와 온전히 이별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된 것은 분명하다.

2021년 1월 23일 나는 그가 죽은 후 처음으로 경남 창녕의 묘지를 찾았다.

묘비도 기념물도 없는 초라한 묘지 앞에 생전에 그가 좋아했다는 딸기와

양갱을 올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남겨놓고 갔냐고.


2006년 11월 나는 그리스 크레타섬을 여행했다.

아테네에서 하루 뱃길 거리의 섬에 볼 만한 게 뭐냐는 물음에

내 친구가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찬 차키스(1883~1967)의

묘비는 일생에 한 번은 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쓴 심경을 묘비에 쓰인 글귀로 대체하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책의 저자인 손병관 기자의 마지막 말이 숙연하게 다가온다.

'니코스 카찬 차키스'의 묘비명을 인용한 그의 마지막 다짐은 앞으로

그에게 닥칠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표현한 것이리라.

이 시대의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했으니 장렬히 산화해도 좋다는 뜻으로 내게 읽혔다.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지금처럼 몰상식하게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에 숨이 막힌다.


저자가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그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손병관 기자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노고가 광폭하게 흘러가는

역사적 흐름에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는 쉼표를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을 놓는 순간 가슴이 아프고 허탈했지만 망자(亡者)의 선택을 존중하게 됐다.


떠난 이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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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비극의 탄생"에 손병관 기자가 인용한 칼럼이다.)


[필사] 광기, 미투를 ‘조롱’에 가두고 있다...(곽병찬)


“피해자를 의심하는 건 책임 전가이자 2차 가해다.”

7월 22일 2차 기자회견에서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증거를 더 공개할 계획이 없다”며 한 말이다.

그는 전날 회견을 예고하면서 “궁금한 건 다 말하겠다”라고 했었다.


의심해서도 안 되고, 문제 제기해서도 안 되며, 그저 믿고 따르라니,

어처구니없었다. 1970년대 긴급조치가 부활했나?


실제로 고소인이 작성해 후임 비서에게 건넨 인수인계서 내용이 공개되자

여성계는 2차 가해라며 분노했다. 인계서엔 고소인의 이런 평가와 충고가 있었다.

“인생에서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 “장관급, 차기 대선주자, 인품도 능력도 훌륭한

분이라 배울 것이 많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쓰기 힘든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여성계의 서슬 때문인지 대개 매체는 사실 보도, 의문 제기보다는 ‘분노’를 비중

있게 전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남한판 수령제’인 유신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모든 행위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완결판인 9호는 심지어 긴급조치에

1년 이상 유기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유언비어’ 금지 조항도 두어 정권에

위험한 사실이나 생각을 단지 말만 해도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의심도 할 수 없고,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는 폭정이었다.


앞서 대리인은 7월 16일 “2차 가해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2차 가해”라고 말했다.


족벌언론과 야당은 대통령이나 여성가족부 장관, 서지현, 임은정 검사에게 까지

“왜 침묵하느냐”라고 비판했다. 긴급조치와 함께 ‘남한판 수령체제’를 옹위하던

국가보안법에도 그런 조항이 있었다. 부모나 자식, 배우자나 형제에 대해서까지

고발하도록 한 불고지죄다.


광기다. 불고 지나 침묵의 죄처럼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은 없다.

정파적 광기, 증오의 광기는 지금 수십 년 동안 거대한 희생을 통해

쌓아 올린 민주적 제도화 헌법적 가치, 이성적 판단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중세 암흑기나 신정체제의 지배자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제사장, 교부, 예언자, 목사 등 대리인은 신을 내세워 면죄부를 팔아 치부하고,

마녀사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신은 없었다.

대리인의 탐욕만 있었다. 오늘날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미투’란 ‘나도 당했다’고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걸고 고발하는 일이다.

증거가 부실해도 시민사회와 사법부가 그 진정성을 수용하려는 것은

거기에 걸린 삶의 무게 때문이다.


반증이 오히려 설득력 있었음에도 재판부가 고소인의 주장을 받아들인

박재동 화백이나 고은 시인 사건은 그 좋은 경우일 것이다. 전 서울시향

대표 박현정, 영화배우 곽도원 등에 대한 기획 혹은 가짜 미투도 있었지만,

미투에 대한 이런 특별한 예우는 바뀌지 않는다.


이른바 ‘박원순 전 시장 위력 성범죄’ 사건에는 대리인만 있다.

그는 성폭력 범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칙을

저버렸던 인물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양심을 돈으로 바꾼

화해 치유 재단 이사였다. 나는 그 대리인을 의심한다.


그래서 고소인에게 묻는다.

우선 인터넷에 떠돌던 이른바 ‘고소장’에 관한 것이다.

누가 구술, 정리, 전담했고, 누가 인터넷에 올렸는가.

대리인이 공개한 성추행 증거는 대부분 이문건에 나온다.

경찰이 조사한다지만, 고소인의 진정성을 지키려면 기획의

가능성이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문을 해명해야 한다.

문건 유포는 피고소인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었다.


대리인은 박 전 시장 핸드폰의 포렌식을 중단하도록 한 법원의 결정에

격렬히 항의했다. 상대의 핸드폰에 있는 성추행 증거라면 고소인의

핸드폰에도 있어야 한다. 신속한 진상 규명을 원한다면 고소인의

핸드폰을 수사기관에서 포랜식 해 증거를 찾도록 하면 된다.

지름길은 놔두고 법원 결정이나 비난하며 힘든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다.


‘미투’는 계속돼야 한다.


성폭력의 더러운 적폐는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적 원칙과 이성적 판단을 억압하는 광기에 의지하면 안 된다.

그건 ‘미투’를 새장 혹은 비웃음을 뜻하는 ‘조롱’에 가둘 뿐이다.


(2020년 8월 6일, ‘서울신문’ 곽병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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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은 이 칼럼을 출고하고 다음 날 ‘서울신문’에 사의를 표했다.

그가 언제 사퇴 결심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칼럼이 그의 사퇴와 관련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칼럼은 서울신문 평기자들의 요구로 포털과 웹사이트에서 모두 지워졌다.

오로지 당일 발행됐던 지면에만 남은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지면을 찍은

사진은 있지만 텍스트 원문은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필사’ 했다.


나는 글쓰기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이 칼럼은 내용과 형식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베껴 써 봤다. 그런데 일간지 지면에 공개된

칼럼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된다.


"혹시, 나의 이 '필사'가 누군가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을 베껴 쓰는 것도 지탄(指彈) 받을 일일까?"


나는 이 글에서 논리적 오류와 내용의 모순을 찾지 못하겠다.

그러니 현재로는 이 글에 대한 나의 지지를 꺾을 생각이 없다.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언제쯤이면 나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끝없이 추락하는 한국 언론은 언제쯤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천박한 자본주의 속에 자리한 지식인에게 '정의(正義)'는 무슨 의미일까?

'손병관 기자', '곽병찬 논설위원' 같은 사람이 발붙일 수 없는 한국의

언론은 어디로 흘러갈까?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가까운 사람이면 더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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