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면 이야기]
“야! 너 이번 학기 끝나면 군대 가지?”
“네...”
“형이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
강의실에서 마주친 선배가 날 보고 한 말이다.
뭔가 맛난 걸 먹는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따라나섰는데 막상 간 곳은
근사한 식당이라고 하긴 좀 그런 후지고 후줄끈한 애매한 공간 이었다.
골목 입구까지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데 안쪽에는 담장이 절반쯤 무너진 폐공장이 보였다.
아마도 페공장을 식당으로 개조한 듯 했다. 식당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슬픈 페공장의 마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저마다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여기 뭐 하는 데예요? 식당이 맞긴 해요?”
“여기 모르냐?, ‘밀면’ 집이야..”
"아하~~, 밀면!!"
나는 그때까지 ‘밀면’ 간판을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먹을 생각을 해 본적도 없었다.
부산에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밀면은 간판으로만 본 음식이었다.
그 '밀면'집은 생긴 것도 특이했지만 음식 값을 내는 방식도 색달랐다.
입구에 서 있는 직원이 줄서있는 손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몇 명이세요?”
“몇 명요.”
그럼 입장료 받듯이 돈을 받고 폐공장(?)의 마당으로 손님을 입장시켰다.
메뉴가 하나 밖에 없으니 카운터 같은 게 있을 필요가 없어 보이긴 했다.
손님이 워낙 많으니 안에서 먹는 사람들이 빠져야 골목길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무너진 담장으로 사람들은 목을 빼고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마당으로 들어서 테이블에 앉으면 음식은 순식간에 나왔다.
육수나 김치가 구석에서 셀프로 가져와야 했다.
추가 메뉴는 ‘사리’가 있었는데 그건 입장료 낼 때 미리 돈을 내야 먹을 수 있었다.
대기 손님이 워낙 많으니 식사 중에 추가 메뉴를 시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후다닥 먹고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여기 참 신기하네..." 생각하며 열심히 두리번 거리며 구경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을 본 적이 없다.
한참을 기다리다 드디어 우리 테이블에 밀면이 나왔다.
나는 기대에 차서 첫 젖가락을 땠는데.....
첫 입을 물고 "으잉~~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건지 솔직히 감동적인 맛은 아니었다.
"이걸 왜들 줄을 서서 먹을까?" 생각이 들어 식당을 나오며 선배에게 물었다.
"형,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맛 있잖아! 너 밀면 맛 모르는 구나!!"
"쩝~~, 이거 한 그릇 얼마야?"
정확한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나는 가격을 듣고 이런 말을 했던것 같다.
"줄 설만 하네..!!!"
"ㅎㅎㅎㅎ"
그 뒤 딱 한 번 더 그곳을 찾은 적이 있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 후 혼자서 그 식당을 찾아갔다.
특이했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 뒤 어찌 됐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몇 3년 사이에 그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큰 길이 생겨 이전의 골목은 찾을 수가 없었다.
페공장이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빨간색 간판에
"밀면" 이라는 글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식당들 앞에는 관광버스들이 여러대 주차되어 있었다.
그날 나는 식당을 그 많은 밀면 식당 중 한 곳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갔던 폐공장 식당은 애당초 이름이 없었다.
입구에 빨간 글씨로 딱 두 글자 "밀면’"만 써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네 이름을 따 그 집을 "가야 밀면"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후 다시 그 동네를 가본 적이 없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서울에 살 때 일이다.
서 ‘밀면’이 부산의 대표 음식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그 폐공장의 밀면이 지금 부산의 명물이 된 '가야 밀면'의 시초가 된걸까?"
서울에 살 때 일이다.
"형님, '가야 밀면' 아세요? 이번 주말에 가족들하고 부산에 '가야 밀면' 먹으러 갑니다."
금요일 퇴근길에 직장 후배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후배가 장인 장모를 모시고 비행기 타고 부산으로 ‘밀면’을 먹으러 간다는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학창시절 먹었던 그것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가야 밀면'인지 알수가 없다.
솔직히 나는 아직 진짜 '가야 밀면'을 먹어보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그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먹으러 간다는 가야동에서 파는 '밀면'은 가난한 대학생이나
어린 직공들이 소소한 금액으로 한 끼를 때우던 진짜 서민의 음식이었다.
무너진 폐공장 건물의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육수를 따라먹던 그 밀면을 먹자고
비행기를 타고 부산을 간다고?? 헐~~~
세상이 바뀌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바뀌기 전의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고.....
예전 '1987'이라는 영화를 보고는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저 때 살아 있었는데, 왜 저런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
간혹,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겪었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가끔은 내가 지나온 시간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 후로 스치며 지나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남겨놓은
글이나 사진이 시간이 흐른 후에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