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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29. 2021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샴페인'이 아니고??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작년, 여름이 다가올 무렵

취직을 못해서 부산에서 빌빌대고 있을 때다.

서울의 후배(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시죠?”

“나야 뭐 잘 있지.”

“뭐하고 지내세요?”

“음,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다. 부고 없으면 잘 있는 거지 뭐..”

“넌, 어떠냐?”

“저도 잘 지내요.”


“왜? 무슨 일 있냐?”

“서울로 올라올 생각 없으세요?”

“........”     


이 전화를 받고 얼마 뒤 나는 서울로 짐을 싸서 올라왔다.

그 친구가 취직 자리 두 곳을 소개해 줬는데 한 곳에 취직할 수 있었다.

임금은 적은 직장이었지만 6개월 이상 놀고 있던 나로서는 단비 같은 일자리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때쯤 그 친구에게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동안 몇 번 월급을 받았지만 밀린 부채들을 해결하느라 뭉개고 있었는데,

그날은 아무래도 밥을 한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친구와는 인연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어린 시절 고작 2~3년 정도를 함께 했는데도 지금까지 날 선생님이라 부르며 

때가되면 연락을 한다. 이제는 내가 취직을 부탁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 위치가 

역전됐지만 아직도 날 깍듯이 존대하며 대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려는데, 

그 친구가 불쑥 쇼핑백을 내민다.


“이게 뭐야?”

“제 거 사면서 한 병 더 샀어요. 잔이 없을 거 같아서 잔도 싼 걸로 하나 샀고요.

제대로 된 잔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심심할 때 드세요.”     

“응? 이거 와인이네. 나 술 안 먹는 거 알잖아.”

“그냥, 심심할 때 한 잔씩 하세요. 독한 거 아니니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응.... 고마워”

“그거, 안 드실 거면 냉장고에 보관하세요.”

“알았어..”     

나는 그 와인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났다.

때 이른 더위가 시작되어 무덥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배가 심하게 고팠다.

그래서 잘 밤임에도 불구하고 ‘국수’를 삶았다.


나는 비빔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재주가 없어 맛있게는 못해도 요즘은 맛있는 

소스를 많이 파니 그걸 넣으면 집에서도 웬만큼 맛있는 비빔국수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국수를 삶고 나서야 그동안 잘 먹던 ‘비빔면 소스’가 다 떨어진 걸 알았다.


"소스를 어떻게 만드나?" 생각하다가,

대충 고추장, 식초, 설탕 정도 넣으면 되겠지 싶어서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 한쪽 구석에서 ‘고추장 돼지불고기 양념’이 나왔다.

맛을 보니 비빔국수 소스와 비슷한 것 같아서 일단 삶은 국수 위에

‘매운 고추장 돼지불고기 양념’을 두 스푼 넣었다. 그리고 올리고당 반 스푼을 넣고, 

식초도 한 숟가락을 넣었다. 냉장고를 뒤지니 콩나물무침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도 털어 넣었다. 그렇게 다 때려 넣고 비벼놓으니 색깔은 꽤 그럴듯했다.

 

그걸 한 입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그런데 먹다 보니 갑자기 달콤한 게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냉장고를 뒤지니, 몇 달 전에 받았던 그 ‘와인’이 눈에 띄었다.


"이거 달콤하다 그랬지?" 생각하며, 어찌어찌 코르크 마게를 따서,

귀찮은 마음에 옆에 있던 종이컵에 따랐더니, 오잉? 

이게 술과 함께 거품 촤~~ 악~~ 소리를 내며 따라지는 거였다.

     

“어라? 이거 샴페인이었네.” 이런 소리를 하며 맛을 봤다.

달콤하니 맛있었다. 매콤하고 시큼한 비빔국수와 딱 맞게 어울렸다.

나는 그 샴페인이 맛있어서 사진을 찍어 그걸 준 친구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서 대뜸 이런 답장이 왔다.


“아니, 제가 준 잔은 어쩌고 거기 따르셨어요?”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답을 보냈다.

“맛 보려고 조금 따라봤어.”


이렇게 답하고 책장에 넣어뒀던 작고 길쭉한 샴페인 글라스를

꺼내서 부랴부랴 샴페인을 다시 따랐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그랬더니,

“치즈 같은 거 있으세요?” 한다.


그래서,

“아니 갑자기 달콤한 게 생각나서 땄어, 근데 이거 되게 맛있네.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와인 이거 계속 찾게 될 거 같은데?

야! 근데 이거 와인이 아니라 샴페인이잖아.” 했더니,      


“ㅋㅋㅋ... 그건 샴페인이 아니고요,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는 거였다.


“으잉, 스파클링 와인? 그건 또 뭐꼬?”

“그런 게 있어요. ‘샴페인’은 ‘코냑’ 같이 지역 이름이에요.

그건 됐고요, 그거 맛있으시면  다음에 더 맛있는 걸로 하나 챙겨 드릴게요.”

     

“뭘 그렇게 자꾸 줄 라그래? 하여튼 고맙다.

와인 이거 정말 새로운 세계네...ㅋㅋㅋ... ”


“역시!!! ㅋㅋㅋ"

"역시, 뭐?"

"매너가 좋으시다고요.. ㅎㅎㅎ... 다음에 봬요.”

이렇게 대화가 끝났다.     


이 친구에게 “나중에 은퇴하면 뭐하고 살고 싶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지금 서울에 있는 거 다 정리해서 가까운 근교로 가서 와인바 같은 거 하나 해 보고 싶어요. 

손님 안 와도 되는 가게 있잖아요.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가게요. 

지금은 와인 공부하는 게 재밌어서인지, 그런 거 하면서 살면 좋겠다 싶어요.

저 세부 갔을 때 데리고 갔던 필리핀 와인바 기억하세요?

거기 너무 좋았어요. 다시 세부 들어가면 거기 꼭 좀 데려다 주세요. 

그때는 와인이 뭔지 몰라서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구경만 했었는데,

지금 가면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런 말을 했다.

     

“돈 많이 벌어야겠네.” 했더니,

“지금 서울에 있는 거 다 팔면 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벌어야죠.”

이런다.


나는 비빔국수와 같이 찍은 ‘스파클링 와인’ 사진은 보여 주지 않았다.       

내게는 와인이 비빔국수, 김치와 먹을 때 맛있는 그냥 별거아닌 '술'이지만 

왠지 그 친구는 그 사진을 보면 뭔가 씁쓸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니 만나는 사람보다 헤어진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어져 있는 사람보다 끊어진 인연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연은 억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함은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인연은 끊어선 안 된다는 사실도 배웠다.    


지나고 보니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예의가 중요했다.  

내가 말하는 예의는 '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나, "건강 잘 챙기시고요." 

또는 "건강이 최곱니다." 같은 말이 너무 흔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머리칼이 삐쭉 솟는다.


"니가 날 왜 사랑하냐?" 이런 말이 튀어나올거 같아서 조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주위를 돌아 보면 '가식'이 몸에 밴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이게 버릇이 되어 행동으로 나와서 문제다. 

평소에 이렇게 살다 보니 자신의 행동이 '가식'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무척 힘들어진다. 


얼마 전 썼던 글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라는 문장을 넣은 적이 있는데, 이 글을 읽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이 문단그렇게 되던가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댓글에,

살다 보니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뭔가 우위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느껴지더라고요제 방식의 '사는 법'이겠죠.” 라고 대댓글을 달았다.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 부르는 나의 무지와 선물한 ‘스파클링 와인’을  

종이컵에 따른 나의 부주의 함에 대해서 세련되게 행동해준 그 친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가식 없이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뿌듯함은 큰 기쁨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도 20년 넘게 내게 예의를 갖춰주는 그가 너무도 고맙다. 

나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다.


인연을 쌓고 사는 사람에게 예의를 잘 지키며 살 생각이다.    

좋은 사람과 가식 없이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덧) 스파클링 와인은 비빔국수와 함께 하면 정말 맛있음.

한 번 드셔 보시라... ^^;;

사진으로 보면 맛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지 맛있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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