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작년, 여름이 다가올 무렵
취직을 못해서 부산에서 빌빌대고 있을 때다.
서울의 후배(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시죠?”
“나야 뭐 잘 있지.”
“뭐하고 지내세요?”
“음,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다. 부고 없으면 잘 있는 거지 뭐..”
“넌, 어떠냐?”
“저도 잘 지내요.”
“왜? 무슨 일 있냐?”
“서울로 올라올 생각 없으세요?”
“........”
이 전화를 받고 얼마 뒤 나는 서울로 짐을 싸서 올라왔다.
그 친구가 취직 자리 두 곳을 소개해 줬는데 한 곳에 취직할 수 있었다.
임금은 적은 직장이었지만 6개월 이상 놀고 있던 나로서는 단비 같은 일자리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때쯤 그 친구에게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동안 몇 번 월급을 받았지만 밀린 부채들을 해결하느라 뭉개고 있었는데,
그날은 아무래도 밥을 한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친구와는 인연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어린 시절 고작 2~3년 정도를 함께 했는데도 지금까지 날 선생님이라 부르며
때가되면 연락을 한다. 이제는 내가 취직을 부탁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 위치가
역전됐지만 아직도 날 깍듯이 존대하며 대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점심을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려는데,
그 친구가 불쑥 쇼핑백을 내민다.
“이게 뭐야?”
“제 거 사면서 한 병 더 샀어요. 잔이 없을 거 같아서 잔도 싼 걸로 하나 샀고요.
제대로 된 잔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심심할 때 드세요.”
“응? 이거 와인이네. 나 술 안 먹는 거 알잖아.”
“그냥, 심심할 때 한 잔씩 하세요. 독한 거 아니니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응.... 고마워”
“그거, 안 드실 거면 냉장고에 보관하세요.”
“알았어..”
나는 그 와인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났다.
때 이른 더위가 시작되어 무덥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배가 심하게 고팠다.
그래서 잘 밤임에도 불구하고 ‘국수’를 삶았다.
나는 비빔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재주가 없어 맛있게는 못해도 요즘은 맛있는
소스를 많이 파니 그걸 넣으면 집에서도 웬만큼 맛있는 비빔국수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국수를 삶고 나서야 그동안 잘 먹던 ‘비빔면 소스’가 다 떨어진 걸 알았다.
"소스를 어떻게 만드나?" 생각하다가,
대충 고추장, 식초, 설탕 정도 넣으면 되겠지 싶어서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고 한쪽 구석에서 ‘고추장 돼지불고기 양념’이 나왔다.
맛을 보니 비빔국수 소스와 비슷한 것 같아서 일단 삶은 국수 위에
‘매운 고추장 돼지불고기 양념’을 두 스푼 넣었다. 그리고 올리고당 반 스푼을 넣고,
식초도 한 숟가락을 넣었다. 냉장고를 뒤지니 콩나물무침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도 털어 넣었다. 그렇게 다 때려 넣고 비벼놓으니 색깔은 꽤 그럴듯했다.
그걸 한 입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그런데 먹다 보니 갑자기 달콤한 게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냉장고를 뒤지니, 몇 달 전에 받았던 그 ‘와인’이 눈에 띄었다.
"이거 달콤하다 그랬지?" 생각하며, 어찌어찌 코르크 마게를 따서,
귀찮은 마음에 옆에 있던 종이컵에 따랐더니, 오잉?
이게 술과 함께 거품 촤~~ 악~~ 소리를 내며 따라지는 거였다.
“어라? 이거 샴페인이었네.” 이런 소리를 하며 맛을 봤다.
달콤하니 맛있었다. 매콤하고 시큼한 비빔국수와 딱 맞게 어울렸다.
나는 그 샴페인이 맛있어서 사진을 찍어 그걸 준 친구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 친구에게서 대뜸 이런 답장이 왔다.
“아니, 제가 준 잔은 어쩌고 거기 따르셨어요?”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답을 보냈다.
“맛 보려고 조금 따라봤어.”
이렇게 답하고 책장에 넣어뒀던 작고 길쭉한 샴페인 글라스를
꺼내서 부랴부랴 샴페인을 다시 따랐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그랬더니,
“치즈 같은 거 있으세요?” 한다.
그래서,
“아니 갑자기 달콤한 게 생각나서 땄어, 근데 이거 되게 맛있네.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와인 이거 계속 찾게 될 거 같은데?
야! 근데 이거 와인이 아니라 샴페인이잖아.” 했더니,
“ㅋㅋㅋ... 그건 샴페인이 아니고요,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는 거였다.
“으잉, 스파클링 와인? 그건 또 뭐꼬?”
“그런 게 있어요. ‘샴페인’은 ‘코냑’ 같이 지역 이름이에요.
그건 됐고요, 그거 맛있으시면 다음에 더 맛있는 걸로 하나 챙겨 드릴게요.”
“뭘 그렇게 자꾸 줄 라그래? 하여튼 고맙다.
와인 이거 정말 새로운 세계네...ㅋㅋㅋ... ”
“역시!!! ㅋㅋㅋ"
"역시, 뭐?"
"매너가 좋으시다고요.. ㅎㅎㅎ... 다음에 봬요.”
이렇게 대화가 끝났다.
이 친구에게 “나중에 은퇴하면 뭐하고 살고 싶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지금 서울에 있는 거 다 정리해서 가까운 근교로 가서 와인바 같은 거 하나 해 보고 싶어요.
손님 안 와도 되는 가게 있잖아요.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가게요.
지금은 와인 공부하는 게 재밌어서인지, 그런 거 하면서 살면 좋겠다 싶어요.
저 세부 갔을 때 데리고 갔던 필리핀 와인바 기억하세요?
거기 너무 좋았어요. 다시 세부 들어가면 거기 꼭 좀 데려다 주세요.
그때는 와인이 뭔지 몰라서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구경만 했었는데,
지금 가면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런 말을 했다.
“돈 많이 벌어야겠네.” 했더니,
“지금 서울에 있는 거 다 팔면 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벌어야죠.”
이런다.
나는 비빔국수와 같이 찍은 ‘스파클링 와인’ 사진은 보여 주지 않았다.
내게는 와인이 비빔국수, 김치와 먹을 때 맛있는 그냥 별거아닌 '술'이지만
왠지 그 친구는 그 사진을 보면 뭔가 씁쓸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니 만나는 사람보다 헤어진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어져 있는 사람보다 끊어진 인연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연은 억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함은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인연은 끊어선 안 된다는 사실도 배웠다.
지나고 보니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예의가 중요했다.
내가 말하는 예의는 '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나, "건강 잘 챙기시고요."
또는 "건강이 최곱니다." 같은 말이 너무 흔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머리칼이 삐쭉 솟는다.
"니가 날 왜 사랑하냐?" 이런 말이 튀어나올거 같아서 조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주위를 돌아 보면 '가식'이 몸에 밴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이게 버릇이 되어 행동으로 나와서 문제다.
평소에 이렇게 살다 보니 자신의 행동이 '가식'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무척 힘들어진다.
얼마 전 썼던 글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라는 문장을 넣은 적이 있는데, 이 글을 읽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이 문단, 그렇게 되던가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댓글에,
“살다 보니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뭔가 우위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제 방식의 '사는 법'이겠죠.” 라고 대댓글을 달았다.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 부르는 나의 무지와 선물한 ‘스파클링 와인’을
종이컵에 따른 나의 부주의 함에 대해서 세련되게 행동해준 그 친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가식 없이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뿌듯함은 큰 기쁨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도 20년 넘게 내게 예의를 갖춰주는 그가 너무도 고맙다.
나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다.
인연을 쌓고 사는 사람에게 예의를 잘 지키며 살 생각이다.
좋은 사람과 가식 없이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덧) 스파클링 와인은 비빔국수와 함께 하면 정말 맛있음.
한 번 드셔 보시라... ^^;;
사진으로 보면 맛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지 맛있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