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2부)

by 벼랑끝

첫사랑...(2부)


나는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 친한 친구가 없었다.

중학교 시절 가까웠던 친구 4명이 모두 다른 학교로 진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달라도 우리 4명은 자주 만났다. 거기에는 그녀의 영향도 컸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그녀를 처음 만난 사람은 친구 4명 중 A였다.

A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는데 그가 친구를 도우러 교회에 갔다가 거기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와 A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교회 행사에 일을 도우러 갔다가 둘이 눈이 맞은 것이었다.

둘의 집이 가까워서 교회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떡볶이를 몇 번 먹게 됐고 그렇게 가까워진 사이였다.


당시 우리 세계에서는 이 정도면 여자 친구가 됐다는 의미였다.

또한 이런 식으로 여자 친구가 생기면 모두에게 소개하는 것이 무언의 규칙이었다.

특히, 이성 친구는 큰 자랑거리였기에 억지로 일을 만들어서라도 여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

어쨌든 A는 우리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그 덕에 나는 처음으로 성별이 다른 사람과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남학교와 여학교로 구분된 곳이 많았던 당시로는 이성 친구가

생긴다는 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이런 관계는 많은 사연을 낳게 된다.

남자 네 명과 여자 한 명이 함께 다녔으니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결국 “내가 널 위해서 포기해 주마.”

이딴 대사를 읊조리는 녀석이 생겼고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뻑뻑 빨면서 소주병을 까거나, 괜히 튼튼한 시멘트 벽을 주먹으로 치는 희한한 일이

생기곤 했다.


유치해 보이지만 당시 우리에겐 무척 심각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이와 관계없이 3각, 4각 관계는 심각한 일 아닌가?

이렇게 애매하게 행복한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당시를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존재감이 제로에 가깝던 나는 계속 볼 수만 있다면 그녀가 누구의 전유물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뀐 후 그녀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후 1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다른 도시로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이사를 갔다. 그녀는 떠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누구에게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이 말은 그녀가 떠난 후 모두가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녀가 왜, 그런 식으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당시는 그녀의 어머니가 겪었던 이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일반인에게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 흉내를 내던 남자 고등학생 4명은

모두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거의 만나지 않았고 우정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입시의

소용돌이 속에 녹아들어 갔다.


그해 겨울이 지나자 누구는 대학에 갔고 누구는 재수를 했으며 어떤 녀석은 취직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며 우리는 더욱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만약 가을에 접어들던 어느 토요일에 내가 시외버스를 타지 않았더라면 첫사랑과 우정에

관한 진부한 스토리는 이 정도에서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가

않은 체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다. 최루가스로 가슴에 통증을 느끼던 어느 날 나는 교문 앞에서

갑자기 그녀를 찾을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이사 간 도시에는 남녀 통틀어 상업학교가 하나밖에 없었다.

이 말은 학교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토요일 일찍 집을 나서 그녀가 있다는 도시로 길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과 달리 고등학생은 토요일 오전에 수업이 있었다.

그러니 12시 전에만 학교 앞에 도착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해 봤지만,

학교에 특별한 일만 없다면 만날 확률은 매우 높아 보였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는 교무실로

찾아가 이혼한 아빠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주소를 알아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오전 10시쯤 그녀가 다닌다는 학교 앞에 도착해서 문방구 앞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12시가 좀 지나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문에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친구들과 함께 교문을 나서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꽤 먼 거리였고 또래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섞여 있었지만 그녀는 내 눈에 확 꽂혀 들어왔다.

전보다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고 머리카락은 좀 더 길어졌으며, 왠지 교복의 앞 매무새가

타이트해진 듯 보이는 것 외에는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말총머리로 묶은 머리 덕분에 단발머리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목선이 보여서인지 전보다 좀 날씬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녀를 발견한 후 나의 행동이었다.

막상 멀리서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하자 나는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긴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유 모를 수치심이 깊은 곳에서부터 몰려왔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1년도 넘게 연락도 없다가 학교 앞에 불쑥 나타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면 자연스러운 걸까?

그것도 다른 도시의 낯선 학교 앞에서 말이다. “지나다 들렀어.”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랑을 고백한 사이었거나 뽀뽀라도 한 번 해본 사이라면 모르겠는데

나와 그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무리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범접할 수 없는 여신 같은 존재였다. 나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긴 채 멍하니 옆을

지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전봇대 뒤에 숨은 채 등을 기대고 이따위 말을 중얼거렸다.

“다음에 와서 말을 걸어보자.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됐잖아.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해서 다시 오자.

오늘은 그녀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자.”


나는 그녀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라고 자신을 위안하며

그냥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이럴 거면 여긴 왜 왔냐? 이 녀석 정말 멍청하네!! 바~보, 멍청이!!”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나의 소심함은 그 정도 소리는 얼마든지 무시할

정도로 강력했다.


나는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기다리다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머리가 쭈뼛 서며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녀가 내 앞에 서서 큰 눈을 껌벅이며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오빠, 여기서 뭐 해?”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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