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3부)
나는 그날 그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버스에서 뜨개질했고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우리는 꼭 어제까지 만났던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는 내내 아주
평범한 일상에 대한 수다를 쉬지 않고 주절댔다.
그녀는 학교 앞에서,
"오빠, 여기서 뭐해?"라고 물은 후,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 집에 잠깐 다녀올 테니 여기서 기다릴래?
아빠한테 갖다 줄 거 있어."
"으~~ 응, 그래.. 여기서 기다릴게" 난 우물쭈물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함께 부산행 버스를 기다렸다.
그녀는 '내가 그곳에 왜 왔는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이런저런 잡담만 계속했다.
나는 버스 옆자리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프로 뜨개질 기술자인 어머니에게
주워들은 뜨개질 상식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잘난 듯 떠들었고, 그녀는 사팔뜨기가 될 것
같은 눈으로 대바늘을 바라보며 학교 이야기, 엄마의 가게 이야기, 취업 이야기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들었다. 또, 운동을 그만둬서 심심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운동을 그만뒀다는 말을 듣고 당시 유행하던 에어로빅을 해보라고 했다.
육상을 그만뒀으니 에어로빅이라도 하면 몸이 잘 받아들일 것이라는 정말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며 늦가을의 오후를 시외버스에서 그녀와 함께 보냈다.
이미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녀와 했던 대화들이 기억나는 게 신기하다.
부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녀는 아빠를 만나러 간다며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다행인 건 그녀가 내게 주소를 남긴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 내게 사진 한 장을 줬다.
흰색 블라우스에 실 넥타이를 하고 입을 반쯤 벌린 채 활짝 웃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 사진 뒷 면에 엄마 가게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부산의 터미널에서 헤어진 후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전화를 몇 번 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해 나는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몇 번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선임들이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으면 나는 그때 받은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그녀는 또 내 삶 속에서 잊혀 갔다.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흔한 스토리처럼 동문들에게 사기도 당하고, 다니던 직장이 망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결혼과 이혼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언뜻언뜻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니던 직장이 부도로 망한 후, 나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다른 삶을 찾아 떠났다. 필리핀 생활이 2년 정도 지났을 때
한국으로 첫 휴가를 왔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2주간의 휴가를 보내고 출국이 이틀쯤
남았을 때 고등학교 시절 그녀를 처음 우리에게 소개했던 A와 연락이 닿았다.
녀석은 아직도 그녀의 아버지 집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A는 나와 통화가 되자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뭔가 줄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A는 내게 그녀에 대한 희한한 이야기 몇 가지를 들려 줬다.
그중 제일 이상한 건 그녀가 사촌오빠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몇 년 전 아빠 집으로
들어왔고, 들어오던 해에 무척 아팠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빠는 그녀가 심하게 앓았음에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했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내였던 그녀의 엄마가 미워서 그랬다고도 하는 데
뭐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A는 말을 지어내는 것처럼 횡설수설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주워들은 소문으로 말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그런 형국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사촌이 결혼하냐?”라고 물었더니
녀석은 씩 웃으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런 소문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죽을 만큼 아팠고 결혼을 했으며 아들이 있는 것 정도였다.
그녀의 아빠가 사는 다세대 주택의 1층은 미용실이다.
그 미용실은 그녀의 엄마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아직도 계속 성업 중이라고 한다.
오래된 그 미용실은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그런 공간이었다.
녀석은 거기서 자기 엄마가 직접 듣고 온 이야기라며 모든 말이 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여하튼 그녀의 소문이 안 좋게 난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덧붙여서 녀석은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2년쯤 전에 마지막으로 동네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쳤는데 그때 그녀가 내 소식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내게 연락이 되면 전해달라고 했다고.
녀석은 핸드폰 번호를 주면서 자기가 2년 넘게 그 번호를 잊어먹지 않고 가지고 있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장황하게 자랑했다. 그리고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걔한테 돈 빌렸냐?”
다음 날,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녀: “여보세요?”
나 : “나 000이야. 기억해?”
그녀: “아! 오빠구나..”
이렇게 그녀와의 세 번째 만남이 시작됐다.
(4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