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소설일까?
첫사랑...(4부)
그날 밤 나는 해운대 바닷가의 카페에서 그녀와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10년도 훌쩍 지난 만남이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녀에게 어떤 옷을 입고 올 것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왜? 못 알아볼까 봐?” 하며 웃었다.
나는 진짜로 그녀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물은 것인데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날 밤 카페 문이 열리며 그녀가 나타났을 때,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10여 년 전 학교 앞에서처럼 카페에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내 눈에 확! 들어와 꽂혔다.
힐을 신어서인지 키가 더 커진 것 같았고 여전히 군살이 없는 운동선수 같은 몸매였다.
흰색 셔츠와 검은색 스커트는 호텔 직원을 연상시켰고, 팔에 감은 베이지색 가을 코트는 뭔지 모를
멋을 증폭시키는 듯했다. 멀리서도 얼굴 윤곽이 뚜렷해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화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화장한 모습을 처음 본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교복을 입고 뜨개질을
하던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내가 그녀를 쉽게 알아본 것처럼 그녀도 날 금방 알아봤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꼭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수다를 떨었다. 직장 이야기, 사람 이야기, 음식 이야기 등 언젠가 버스 안에서
심각한 얼굴로 끝도 없이 뜨개질 이야기를 했던 것 처럼 영양가 없는 말들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줄이 쏟아냈다.
외모가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고 했더니 그녀는 웃으면서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때 버스에서 내 말을 듣고 시작한 에어로빅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다 보니 자격증까지 따게 됐고 덕분에 에어로빅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말도 했다.
버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알게 됐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서 한동안 가을바람이 부는 밤바다를 걸었다.
그녀는 내가 필리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나의 구차했던 10여 년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더 황당한 그녀의 지나온 시간을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그녀가 사촌오빠와 결혼했다고 하는지를 알게 됐고,
처음 만났던 4명 중 한 명이었던 B가 군대에 가기 전 임신을 시킨 사실도 알게 됐다.
그리고 첫 번째 임신이 고2 때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왔던 그 밤에 B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우리 무리 중 B에게 빠져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들러리였던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2번의 임신을 모두 B는 몰랐다는 것이다.
왜? B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임신은 엄마와 해결을 했고,
두 번째는 자연 유산을 했는데 하혈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둘째 아이의 유산은 엄마가 남자 친구가 생겨 아빠의 집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산의 아빠의 집으로 돌아와 다시 B와 만나게 됐는데, B가 군대에 간 후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B에게 연락할 생각도 했지만 B가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되어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투에서 B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녀가 유산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아빠와 오빠 두 남자만 있는 집에서 그녀를 살갑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어렵게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그때 오빠의 친구였던 전남편이
나타났다. 그는 그녀가 중학교 때부터 그 집을 드나들며 그녀를 짝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너 나중에 크면 나한테 시집와라" 이런 말 하던 오빠 친구였던
것이다. 나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녀가 유산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몸으로 도왔다.
부잣집 3대 독자였던 그는 당시 병원비를 비롯하여 물질적으로 꽤 큰 도움을 줬단다.
그녀가 완쾌되자 그는 청혼을 했고 그녀는 굳이 혼인을 마다할 이유를 못 느꼈다고 한다.
그녀의 아빠와 오빠도 이미 버린 걸로 치는 애물단지를 데려가겠다는 녀석이 나타났으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팔자도 기구한 것이 남편과 그녀는 동성동본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은 혼인신고가 안 됐다. 남자의 집에서는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사랑에 눈이 먼 3대 독자 아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어 둘은 결혼식은 하지 않고 살림을 차렸다.
사촌오빠와 결혼을 했다는 이상한 소문은 이렇게 생긴 것 같았다.
결혼 후 한동안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시간이 흘러 아들을 낳았다.
4대 독자인 아이가 태어나자 남편의 집안은 조용히 결혼식을 치렀다.
이렇게 평범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너무나 좋은 사람 같아 보이던 남편이 살다 보니 나쁜 버릇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특별한 직업 없이 부잣집 아들로 용돈이나 타서 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술버릇이 안 좋았다.
원래 술주정이 좀 있기는 했지만 못 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심해진 것이다. 매번 술이 깨고 나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해서 그러려니
하며 살았었는데, 급기야 어느 날 술주정이 매질로 변했고 한 번은 팔이 부러질 정도로
맞았다고 한다.
결국 남편이 너무 심하게 미쳐버린 어느 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구호단체로 피신을 했다.
몇 달 뒤 남편이 수소문을 해 찾아왔지만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평범한 부부도 아이가 생기면 현실적인 삶이 어려워진다.
하물며 도와주는 이 없는 미혼모는 어땠겠는가?
그녀는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새벽과 밤에는 에어로빅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직장을 다니며 생계를 꾸렸는데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죽을 둥 살 둥 알뜰하게 살다 보니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아들이
커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엄마와 사는 것을 점점 힘들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 미혼모의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불필요한 서류와 면담 그리고 인격적 모독에 가까운 소문들이 아이의 학교생활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연락을 했고, 아빠가 나타나
아이를 다독이자 아이는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하지만 4대 독자인 손주를 데려가기 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회유가 시작됐다.
사실 아이가 아빠의 호적에 올라 있으니 법적으로 그녀가 딱히 막을 방법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이도 남편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 싫어하지 않아서 이번 겨울방학이 지나면
아이를 남편에게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놀란 것은 아이에게 내년부터 엄마와 떨어져서 아빠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니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를 보냄으로 생기는 자유를 생각하니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안도감 같은 것이 올라와 엄마로서 부끄러웠다고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해 바다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누가 더 못났나를 자랑하는 듯한 대화를 긴 시간 주고받았다.
나는, 내가 참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삶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우리는 늦가을의 해운대 밤바다를 걸으며 지나간 세월을 나눴다.
헤어질 때 영주동 산복도로 그녀의 집 앞에서,
“오빠는 왜 그날 내게 아무 말도 안 했어?”
“언제?”
“학교 앞에 왔던 날.”
“........”
“부산에 도착했을 때 오빠가 한 번쯤 잡을 수도 있지 않았어?”
“네가 뜨개질하던 그거, 내 거가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그날 그 옷 사이즈 재려고 만났다가 임신을 하게 된 거야.
만약 그날 터미널에서 내가 오빠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
“왜, 나는 그때 오빠와 같이 갈 생각을 못 했을까?”
“..........”
그녀는 잠시 내게 눈을 마주치더니,
“나 잠깐 아이 얼굴만 보고 나와도 되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나 내일 아침에 비행기 타야 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걸 보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날 우리는 가볍게 수인사만 하고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그게 그녀를 본 마지막이다.
그 뒤 필리핀에서 2번 지갑을 잃어버렸다.
첫 번째 지갑에 그녀가 내게 준 예전 사진이 있었다.
무척 아쉬웠다. 내 삶의 한 부분이 날아간 느낌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술이 과했던 어느 날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자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한 건 '첫사랑'이 아니라서 그래.”
술자리였지만 그 친구는 꽤 진지했다.
“첫사랑이 뭔지 아냐?
‘첫사랑’은 둘이 서로 사랑했을 때 붙이는 수식어야.
상호 간에 함께 했을 때 쓰는 말이라고.
너희는 서로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네가 한 건 첫사랑이 아니야.
여기서 중요한 게 뭔지 아냐?
”했냐?”라는 거다 ‘했냐?!’.
‘했냐?’가 중요한 거라고.
넌 안 했잖아. 그러니 그건 ‘첫사랑’이 아냐.
너 혼자서 지랄한 거니까 그건 ‘짝사랑’인 거라고.
몸을 섞지 않은 건 ‘첫사랑’으로 치면 안 돼.
서로가 몸과 마음이 다 섞였을 때 ‘첫사랑’이 되는 거야.
정신적인, 마음만으로, 플라토닉 한 웃기고 있네.
그런 건 첫사랑이 아냐.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을 때 나는 신음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으면서,
새벽녘에 벌거벗은 그녀의 입에서 나는 단내를 맡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첫사랑을 이야기하냐?
네가 첫사랑이라고 우긴다고 첫사랑이 되는 게 아냐?
넌 그냥 혼자 ‘짝사랑’을 한 거야.
그녀가 그걸 알았다면 ‘외사랑’인 거고.
'첫사랑'은 진짜 어려운 거야. 그래서 못해본 사람이 많아.
다들 해봤다고 착각하는 거지.
첫사랑은 운 좋은 사람만 할 수 있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넌 그날 밤에 그 애와 했어야 해.
그랬으면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돼.
둘이 벌거벗고 샤워도 하고, 섹스도 하고,
술도 마시고 끌어안고 잤어야 했다고,
그랬으면 진짜 첫사랑이 완성되는 거였어.
그 뒤에 다시 못 만나도 그건 네 '첫사랑'이야.
그랬다면 아마 그녀는 네 세포 속에 영원히 숨 쉬고 있을 거야.
지금처럼 떠오르네, 안 떠오르네! 그런 소리 안 할걸? “
친구는 그날 밤 꽤 길게 '첫사랑'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 친구의 “사랑학” 강의에 함께 있던 몇몇은 꽤나 감동하는 듯했지만,
솔직히 내겐 그리 공감되지 않았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함께 아파해 주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주는
것 역시 사랑의 중요한 부분이라 믿는다.
비탈길 그녀의 집 앞에서 마지막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과
해운대 카페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숨 막힘과 바닷가에서
잠깐 팔짱을 꼈을 때 팔꿈치에 닿았던 그녀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바닷물에 젖은 스타킹을 벗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여인의 맨살이 상상되는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맨몸을 만지지 않아서 남아 있는 기억도
너무나 많다.
육상 유니폼을 입고 달리기를 하던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
시외버스 옆자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뜨개질을 하던 말총머리 여고생의 모습,
바닷가 벤치에서 내게 기댔을 때 목덜미에서 장미 향을 풍기던 성숙한 여인의 모습.
그 덕분에 지금도 난 단발머리 소녀나 뜨개질을 하는 여인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장미꽃을 보면 향기를 맡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도 나는 공항 면세점에서 장미 향수를
보면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실 몇 번 산적도 있다.
내 젊은 날의 이런 기억들이 섹스의 기억보다 못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마지막 부분과 달리 그녀와의 세 번째 만남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 없었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것 같다.
그녀에게 나는 첫사랑이 아니었겠지만, 내게 그녀는 첫사랑이었다.
처음 만난 사랑.....
살면서 기억의 저 너머에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우연히 장미 향기를 맡게 될 때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내겐 비밀스러운 행복이다.
한국에서는 장미를 쉽게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첫사랑... 끝)
어디까지가 소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