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닭싸움(Sabong)..
[세부(Cebu, Philippines) 남부 투어]
#14, 닭싸움(Sabong)..
달콤한 낮잠에서 깨고 보니 어느덧 저녁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저녁 땟거리를 구하러 호텔 밖으로 나섰더니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사람들 말로는 오늘이 “오슬롭 피에스타(Fiesta, 축제)”가 있는 날이란다.
길가에 노점들이 들어섰고 호텔 맞은편 공터에 사람이 가득하다.
아마 “싸봉(Sabong, 필리핀 닭싸움)”이 열리고 있나 보다.
필리핀은 “싸봉(닭싸움)”이 부분적으로 합법이다.
"부분적으로 합법"이라는 말이 애매할 수 있는데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하는 것은 괜찮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아무 데서나 하다가 걸리면 큰일 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도시에는 합법적으로
“싸봉”을 하는 경기장(Arena)이 있다. '경마장'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된다.
시골이나 도시의 변두리에서는 축제 기간이나 시장이 서는 날(필리핀에도 5일장 같은 게 있다)
합법적으로 “싸봉”을 할 수 있다.
필리핀 사람에게 물어보면,
"싸봉은 안 하는 사람도 없고, 못하는 사람도 없고,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라고 대답한다.
필리핀을 조금만 돌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어디서든지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걸 알 것이다.
"막탄"의 큰 리조트에서도 아침에 닭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못 잤다는 관광객들의 항의가
심심찮게 들어온다. 그럴 때 "시골이라 그래요" 하고 얼버무리고 마는 데 사실은 "싸봉" 닭들이
아침에 기상나팔을 부는 것이다. 웬만한 집에서는 부업 또는 애완용으로 싸움닭 한두 마리씩은
키우고 있으니 새벽마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싸봉'은 도박이 동반되는 경기라서 스포츠로 보기는 좀 힘든 면이 있다.
경마하고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승패가 돈을 의미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오가고 그 가운데 피가 튄다.
닭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기다.
인간들이 닭의 다리에 칼을 채워놓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닭들의 다리에 칼을 채우면서 이 시합은 한 놈이 쓰러져 못 움직일 때까지 하는 데스매치가 됐다. 인간들은 그중 하나에 돈을 건다. 닭들은 자신들의 다리에 칼이 채워져 있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본능이겠지만 모든 수탉들은 눈만 마주치면 죽일 듯이 달려들어 상대를 공격한다.
싸움을 붙이는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냥 눈만 마주치게 해 주면 지들이 알아서 싸운다.
야생에서라면 벼슬이나 좀 뜯기고 닭털이나 날리다 한 놈이 도망가는 선에서 싸움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아레나(Arena)"에는 갈 곳이 없다. 그러니 누구 하나가 쓰러져 못 움직일 때까지 싸워야 한다.
처음 싸봉을 봤을 때 경기가 끝난 후 닭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주인 한 명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기면 돈 벌어서 좋고, 지면 우리 가족이 닭고기 먹어서 좋고..."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기가 끝나면 이기건 지건 닭들의 부상이 매우 심한 건 분명하다.
피에스타는 보통 금요일부터 시작해서 3일 정도를 밤을 새우면서 진행된다.
노점상들이 동네 큰길에 들어서고 주최 측에서는 공연, 미인대회, 댄스파티 등
재밌는 볼거리를 주관하고 먹을 것도 준비한다.
동네마다 열리는 피에스타를 일부러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재밌는 일이 많지 않은 시골 동네에서는 옆 동네 피에스타는 큰 놀거리인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은 피에스타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야!! 오늘 000 동네 피에스타 한데, 내가 아빠 오토바이 끌고 올 테니까 같이 가자.”
뭐 보통 이런 식인 거다.
옆 동네 남자(or 여자)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밤늦게 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날이니 젊은이들에게 이 보다 좋은 행사는 없을 것이다.
마을의 공터에서 메인 행사가 시작되니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공연을 지켜보다 무대 근처의 노점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손님이 없으니 방 앞의 2층 로비가 내 서재 같다.
방으로 올라오며 카운터에 물으니 1층에는 손님이 2방이나 들었다고 캐셔가 좋아한다.
수영장 옆에는 손님들이 산미겔 맥주를 박스 째 놓고 마시고 있었다.
2층 로비에 있는 나를 보더니 내려와서 같이 마시자고 손짓을 했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고래상어 투어'를 왔다며 오슬롭 피에스타가 너무 재밌다고 했다.
나는 인사만 하고 술은 사양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수영을 잠깐 했다.
한 밤에 수영장에서 연결된 바다로 들어가니 바닷물이 따뜻하다.
이대로 떠내려가면 누가 날 찾을 수는 있을까?
밤에 바다에 누울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한국에서 수영을 배운 후 가장 하고 싶던 것 중 하나가
달과 별을 보며 물 위에 떠 있는 일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내일 뭘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고 돌아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낮잠 때문인지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꽤 오래 뒤척이다가 일어나 휴대폰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해보고 싶던 것을 하고 있으니 됐다."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으니 됐다."
"나는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니 됐다."
이렇게 메모를 하고 다시 누웠다.
세부 섬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보내는 집 나온 지 3일째의 밤이었다.
(1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