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나쁜 남자' 신드롬)
#4 오늘은 그녀와....
부제: 나쁜 남자 신드롬 (4부)
그녀는 한동안 세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2개월쯤 지났을 때 문자 하나가 왔다.
“I already back-MIDO”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혼자 Bar에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가게에 손님이 꽤 많았다. 대기실 댄서들 틈에 미도의 얼굴이 보였다.
혼자 테이블에 앉아 물끄러미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마마상이 옆에 앉는다.
“미도 불러줘?” 하고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30분쯤 지났을 때 미도의 순서가 됐다.
전 보다 조금 여윈 듯한 몸매의 미도가 봉을 잡고 무대에 섰다. 그녀가 봉을 잡기 전에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나는 무표정했고 그녀 역시 무표정하게 날 바라봤다. 그날 나는 그녀의 춤이
끝나기 전에 그곳을 나왔다.
미도가 춤추는 모습을 볼 때 나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미도는 정말 춤을 잘 춘다.
봉을 한 손으로 잡고 몸을 날려 돌거나 다리만 이용해서 거꾸로 매달려 봉 끝까지 올라갈
때면 춤이라기보다 서커스를 보는 느낌이다. 다리를 일자로 벌려 봉에 매달려 돌면서
바닥으로 내려올 때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런 테크닉은 댄서들 중에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 그런 춤을 보고 있을 때면 저 깊은 곳에서 그녀를 정복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솔직히 나는 미도를 거칠게 대했다는 그 한국인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나도 그녀에게 그러고 싶은 욕망이 내 몸속 어딘가에 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그녀는 많은 이들의 정복 대상이다. 강하고 아름답지만 돈 몇 푼 만 주면 그것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다면, 용기를 내는 인간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 남자는 용기를 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성적 취향이 '옳다', '그르다'는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것을 싫어했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다. 그건
범죄이고 부도덕한 짓이다. 나는 그녀가 돈에 의해서 그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집으로 오는 길에 문자가 왔다. “Whr r u?”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그녀를
자주 만났다. 일 때문이었다. 그 해에는 유독 술 손님이 많았다. 그들은 여자를 원했고
그럴 때면 나는 그 가게로 데려가서 마마상과 미도에게 그들을 넘겼다.
그녀에게 한 달에 두세 번은 손님을 엮어줬다. 마마상은 매번 커미션을 줬고,
나는 그럴수록 더 자주 그곳에 손님을 같다 바쳤다. 그럴 때마다 미도는 내가 데려 간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호텔로 나갔다.
그즈음 나도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자주 즐겼다. 술 손님이 늘면서 수입이 좋아져서
유흥비로 돈을 써도 큰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님들은 꼭 미도가 있는
Bar로만 데리고 갔다. 그리고 되도록 돈 많은 손님에게 지명받을 수 있게 신경을 썼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손님들 중 리더처럼 보이거나 접대를 하는 쪽 사람에게
이 말 한마디면 됐다.
“저기 노란 머리 있죠? 잘 빠진 애, 쟤가 여기 에이스예요. 좀 비싸기는 해도 끝내줘요.”
이런 말 한마디만 흘리면 일은 만사형통이었다.
그들 중 가장 직위가 높거나 돈 많은 사람이 그녀를 선택했다. 가끔 나 보고도 파트너를
고르라는 손님도 있었지만, 그럴 때 나는 매우 젠틀한 척하면서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렇게 행동을 하면 손님은 내가 책임감이 투철한 좋은 가이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지 그곳에서 여자를 고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We meet”.
나는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예의 섹시하고 차가운 무대화장을 하고 있었다.
-미도 : 왜 나한테 돈 달라고 안 해?
-나 : 너 돈 없잖아
-미도 : 그렇긴 해도 이상하잖아.
-나 : 뭐가?
-미도 : 너 요새 나한테 손님도 자주 붙여주고, 돈도 달라고 하지 않고.
-나 : 너 손님 만나면 나도 커미션 생겨.
-미도 :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해, 커미션 몇 푼 된다고.
-나 : 이상할 거 없어. 돈 생기면 갚아.
미도가 잠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도 : 오늘 나하고 잘래?
-나 : 왜? 그렇게 해서 빌린 돈 깔려고?
-미도 : 쓸데없는 소리 마, 돈은 갚을 거야. 할래, 말래?
-나 :......
-미도 : 너 그날 밤, 왜 안 했어?
-나 :......
-미도 : 옷 다 벗기고, 왜 안 했어?
-나 : 너 자고 있지 않았냐?
-미도 : 바지 벗길 때 깼어.
-나 : 몰라, 기억 안 나. 술 냄새가 싫었나 보지 뭐.
-미도 :....
-나 : 나도 궁금한 거 있어.
-미도 : 뭐?
-나 : 너, 왜 그날 밤 나한테 문자 했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미도 : 번호는 마마상이 알려줬고, 문자는 잘못 간 거야.
-나 : 그랬군... 알았어..
-미도 : ㅂ ㅏ ㅂ ㅗ
-나 : 뭐? 뭐라는 거야?
미도는 날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도 :...... (네 번호 6개월 전부터 저장되어 있었어, 그동안 너한테 갔던
낚시 문자들 누가 보냈겠냐. 이 바보야! )
그녀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돌아서 Bar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게로 들어간 후 한동안 주차장에 서 있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가 마지막에 한 말이 뭘까 생각해 봤다.
“ㅂ ㅏ ㅂ ㅗ”
영어 같기도 하고, 필리핀 말 같기도 하고, 한국어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얼마 후 한국으로 철수하는 후배가 집에 필요한 물건 있으면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필리핀에서 사업에 실패해 한국으로 철수하는 중이었다. 남은 살림살이들은 한국에서는
쓸모가 없지만 현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것이 많다. 특히 ‘전기 압력솥’ 같은
것은 필리핀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귀한 물건 중 하나다.
다음 날 그 친구 집엘 갔더니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사람들이 가져가서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인사만 하고 빈손으로 나오는데 그 친구가 박스 하나를 준다.
“형, 이거 영화 CD야. 대부분 옛날 영화라서 아무도 안 가져가네.
볼만한 거 있는지 한 번 봐.” 한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그 박스를 차에 싣고 집으로 왔다.
그 박스는 거실 구석에 꽤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다.
모처럼의 휴일, 거실 청소를 하다 그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열어보니 대부분 봤던 영화들이거나 소장 가치가 없는 영화뿐이었다.
그런데 그중 ‘나쁜 남자’라는 영화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영화였다.
컴퓨터에 CD를 넣고 영화를 돌렸다.
나는 한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화 속에는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5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