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4일 밤...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손병관 기자'가 쓴 "비극의 탄생"이었다.
이 책을 읽고서 박원순 시장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 됐고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나대로의 해석이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까지 박원순 시장은 내게 착한 사람, 행정 잘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그리고 외적으로는 매력이 없는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그는 조금은
불편한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마지막이 무척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책을 덮을 즈음에는 무척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내 마음속에 두기로 했다. 그러나 존경할 수는 없었다.
박원순 시장이 떠나고 1년 4개월이 지났다. 연말이 되면서 한국은 대통령 선거의
소용돌이 속으로 온 나라가 빨려들었다. 꼴불견 인간들이 인터넷과 TV 화면을
가득 채우며 여기저기서 거짓말을 해대고, 믿을 수 없는 말들이 연일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 대통령이 어마어마한 것을 발표했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가 국가수반으로서 얼마큼의 성과를 올렸는지
수치상으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청렴한 선비의 삶을 살고 있으며 뚝심 있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펼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탄핵과 코로나라는 전쟁에 버금가는
국난의 상황에서 지금까지 한국을 훌륭하게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통령이 내년 대선을 앞둔 2021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박근혜 사면”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발표는 한국 사회에 거의 핵폭탄급의 영향을 줬다.
수많은 단체에서 분 단위로 성명을 내고 찬반 양론으로 모든 미디어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일단, 나는 대통령의 선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이 일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의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결단을 내리는 장면을 보고 문재인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존경하기로 했다.
지금은 발표 초기 단계라 여러 추측과 낭설이 난무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번 일은 대통령의 결단이다. 이 말은 이번 결정에 대해서 대통령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이번 발표를 위해서 그는 많은 조언을 구했을 것이고 꽤나 긴 생각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바둑의 고수다.
그래서 "장고(長考, 긴 생각) 끝에 악수"라는 바둑의 명언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이 명언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모든 장고는 악수"라는 생각이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둬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부분의 '장고(長考)'는 좋은 결과를 낸다.
어쩌다 나오는 악수를 두고 "장고 끝에 악수(惡手)"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결정을 위해 장고를 했을 것이고 그 결과가 이번 '수(手)'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수(手)가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를 믿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통령이 입술이 터진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대통령이 고민이 많구나! 그래도 어쩌려, 나랏일이 다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들은 대통령 입술이 터진 것이 해외순방에 따른 피로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즈음부터 대통령이 이번 결정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박근혜의 사면이라는 발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면' 발표가 있고 만 하루 동안 나는 눈과 귀에 들려오는 모든 정보와 논평을 차단했다.
왠지 뻔한 이야기를 떠들 것 같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표가 있고 24시간이 지나 오늘 새벽이 됐다.
거리는 올 겨울들어 최고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멈췄을 때 문득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청와대 한쪽 구석에서 고뇌에 찬 밤을 보냈을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지난 밤을 보냈을까?
국민의 절반은 욕하고 나머지 절반도 뜨뜻미지근해 하는 이 결정을 할 수밖에 없던
자신이 한탄스럽지 않았을까?
나는 박근혜가 옥중에서 죽기를 바랐다.
생때같은 아이들의 목숨을 잃게 했고 국격을 바닥에 처박아 나라에 해를 입힌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그의 권한으로 그녀를 풀어준 것에 대해서도
그리 할 말은 없다. 주변의 압력으로 대통령이 이번 선택을 했을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의 선택을 존중한다. 과감한 결단을 한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박원순 시장을 사랑한다.
이제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생겼다.
어제 2년 동안 컴퓨터 하드에서 돌아다니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봤다.
왠지 손이 가지 않아 보지 못하던 영화를 거의 2년 만에 클릭한 것이다.
영화는 재밌고 충격적이었다.
이 영화에는 지하에서 "4년 3개월 17일"을 지낸 사나이가 나온다.
그에게 자유는 가끔 밖에 나와 햇볕을 쬐며 부인과 짧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은 먹을 것만 주면 그가 지하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문득 박근혜가 떠올랐다. 박근혜는 4년 9개월 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다.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 사나이보다 더 긴 시간이다. 가끔 병(病)을 핑계로 바깥출입을
했지만 어쨌든 자유가 없는 영어의 몸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의 교도소 방이
좋았다고는 하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 보다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1,730일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건강이 악화되어 70세의 노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교도소를 나서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나간 1,730일의 시간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신의 무능과 탐욕 덕분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사람 앞에 사죄할 수 있는
식견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잘못을 뉘우친 적이 있기는 할까?
진심으로 무릎 꿇는 모습을 그녀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럴 일이 없을 것을 알기에 노인의 귀환 소식이 씁쓸하기만 하다.
귓불이 시리고 가슴이 서늘한 것이 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JJ21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