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 초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이라는 방송을 알게 됐다.
실로 충격이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당시까지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의
향연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내가 너무 무관심하게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줬다고 할까.
그 뒤로 10여 년이 넘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정치 관련 콘텐츠들을 들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컸다.
정치 혐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21년 가을부터였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모든 미디어는 너무나 과열됐고 거기에 휩쓸린
대중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가 아니라 중요한 이슈들을 내편 네 편으로 나뉘어
진영 논리에 갖다 붙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저쪽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울분이 치솟으며 토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던 중 내가 무척 싫어하는 직장 상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야! 너는 이어폰 좀 그만 꽂고 있으면 안 되냐?
도대체 뭘 그렇게 듣고 있냐?"
휴식 시간에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니 그게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쉬는 시간인데 좀 편히 있으면 안 되나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그 순간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그 뒤로 회사에서는 되도록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자연스레 정치 콘텐츠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꽤 심한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알림 설정을 해 놓은 수많은 콘텐츠들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이 날 지나쳐간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약간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해서 '멍 때리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각할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란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 시간'이라고 해야 맞겠다.
귀에서 이어폰을 뽑자 퇴근 후 집에서도 정치 콘텐츠의 소비가 줄어들었다.
덕분에 집에서 청소도 좀 더 열심히 하게 됐고 글을 쓰거나 요리를 할 생각도 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 빗자루질이나 하면 잘했던 청소를 매일 같이 청소기도 돌리고 물걸레로
바닥도 닦는 기특한 짓을 시작한 것이다.
요리에 재능이 없으니 유튜브로 레시피를 검색하다 보니 정치 콘텐츠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나 음악 그리고 과학 관련 콘텐츠들을 보게 됐는데 이런 것들도 한 번
클릭을 하게 되면 꽤 오랫동안 시청을 하곤 했다. 내가 모르던 여러 종류의 일상이 눈에 띄자
정치 콘텐츠로 채워져 있던 내 알고리즘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근혜' 사면이라는 큰 이슈가 터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말 오랜만에 정치 콘텐츠를 다시 들어 보려고 연결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만큼 집중에서 들을 수가 없었다.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들에서 너무나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내가 '정치 혐오'가 생긴 건가?" 생각하게 됐다.
아침이면 내가 일하는 직장에는 '조선일보'와 '한국 경제신문' 그리고 지역 신문이 배달된다.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그 신문의 헤드라인은 아직도 내 속을 안 좋게 만든다.
시종일관 어떻게 그렇게 변하지도 않을까?
하지만 습관적으로 꽂고 있던 내 귀의 이어폰과 그 헤드라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어폰을
빼고 난 뒤에야 알게 됐다. 그 이어폰은 나를 너무 깊고 진한 색깔로 변하게 했고 그로 인해
개인적인 많은 부분을 놓치게 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양비론자'나 '정치 혐오론자'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지지하는 정당이 분명하고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다.
지난 시간의 정치 과몰입이 정치와 정치인을 바라보는 기준은 만들어준 셈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확립시켜 줬다.
"정치 혐오"는 과격한 단어지만 적어도 내겐 "여유"라는 단어를 돌려줬다.
이 '여유' 덕분에 적어도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화'는 발전이 아닌 다양성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가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금은 더 넓게 다양해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여유(餘裕)'가 만족스럽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