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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r 01. 2022

숫자가 부여하는 정체성

(편지) 생일 축하합니다....

To. OOO


어릴 때부터 생일을 모르고 살았어요.

일단 음력으로 생일이 섣달 그믐에 가깝다 보니 나이 계산이 애매하거든요.

주민등록 상으로는 해가 바뀐 정월에 생일이 있다는 거죠. (띠도 바뀐다는.. ㅠ.ㅜ)


필리핀 살 때 현지인들이

"What is your Korean age?" 이렇게 물으면,

저는 "I don't know."라고 대답했어요.

이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이 농담인 줄 알고 좋아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진짜 제 나이 계산이 안 돼서 이렇게 대답하는 거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한국 나이로 몇 살인지 정확히 몰라요.

음력 12월에 태어난 사람의 숙명이라 받아들입니다. (나만 그런가?)


하여튼 새 밑에 태어난 삶이다 보니 어릴 때도 생일상을 별로 받지 못했고요.

저보다 더 이상한 생일을 가진 어머니는 평생 생일상을 못 받아 보셨죠.

우리 집은 아버지 생일 외에는 잘 차리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는 아버지 생일도 어머니가 그리 잘 챙긴 거 같지 않아요. (음~~)


그런데 이렇게 생일을 등한히 하며 산 게 제게는 많이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어느 정도 지나서는 제 나이를 정말로 잊어버렸거든요. (농담 같지만 진짜라는...ㄷㄷㄷ)


어떤 날은 (특히 컨디션 안 좋을 때) 거울을 보면서,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아졌지?"

"왜 이렇게 피부가 쭈글쭈글 해 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 맞다!! 내가 나이를 먹었지?"

이런 소리를 혼자 뱉고는 큭큭거리기도 해요.


가끔 이런 생각 뒤에 "이 나이 먹고"로 시작하는 다른 생각이 따라붙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저는 생각을 여기서 멈춥니다.


헉!!!

쓰다 보니 말이 많아졌네요... ㅎㅎㅎㅎ

그만 여기서 끊을게요. ^^;;;

나이를 모르고 사는 세상도 불편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장황해졌다는.... ㅋㅋㅋ


하여튼 축하드려요.

이번 생일부터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고 하니......


거울을 보는 횟수만 줄이면 숫자가 커지는 게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돌아볼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더 구체적이 되고 저는 그랬거든요.


그리고 숫자가 커지는 만큼 행복한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기억해 낼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이 질 테니까.



추억은 망각의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부유물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가라앉고 자극적이었던 것들만 물 밖에 모습을 드러낸다.

물 밖에 드러난 그 부유물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 어학연수, Love line 중 발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모두 결국은 잊히지만 자주 떠올리는 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분명한 거 같아요. 그러니 아름다운 것을 자주 생각하시라는... ㅎㅎㅎ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만....



덧)

편지 쓰다 보니 어머니 생일 관련 글 한 번 써봐야겠는 생각이 물씬 드네요.

제 어머니 생일이 진짜 애매한 날이거든요. 저 보다 훨씬 더... ㅎ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 글을 좀 써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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