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체불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랑끝 Aug 17. 2022

쓰기 싫은 글

"취미가 직업이 되는 거, 난 반대야!"

오늘 정말 쓰기 싫지만 꼭 써야 하는 글 2,500자를 썼다. (정확히는 2,620자)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는 듯 포장해서 잘난척하는  글이었다.

사흘에 걸쳐 썼음에도 글이 제대로 써지지를 않았다. 

"젠장~~~ 이런 글을 매일 쓰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문득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광고 카피" 공부를 잠깐 한 적이 있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이 비슷한 말을 내게 했었다.


그 친구는 글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고, 말도 재밌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송에 소질이 있는 친구였다.


서울에서 "카피라이팅" 교육을 하는 동안 내 자취방에 머물면서 

취직자리를 구하고 다녔는데 결론은 좋지 못했다. 교육기간이 끝나고

얼마간 더 버티다가 결국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 뒤 몇 년간 서로 

연락이 끊겼다가 부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났을 때 제일 놀란 점은 달라진 헤어스타일이었다.

아직 삼십 대 초반이었음에도 머리가 듬성듬성해서 속이 다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딱 봐도 얼굴색이 안 좋아 보였다.


나   : "야~~, 오랜만이다?"

친구: "이게 얼마만이냐? 5년은 된 거 같은데?"

나   : "연락이 안 돼서 소식을 몰랐네.?"

친구: "그저 그래. 너한테 참 미안하다. 신세 갚을 것도 많은 데 말이야"


나   : "해준 것도 없는데 뭘 갚아?"

친구: "너네 집에 꽤 있었잖아."

나  : "잠만 잤는데 뭐?"

친구: "그래도 그런 게 아니지. 어쨌든 그때 고마웠다. 


나   : "지금은 어떻게 지내?"

친구: "나, 그때 부산에 와서 취직했어, 카피라이터로"

나   : "우와, 완전 잘 됐네. 꿈을 이룬 거잖아."


친구: "근데, 그게 잘된 건지 모르겠다. 넌 어떻게 됐어? 그때 합격했었잖아."

나   : "난 그 회사 출근 안 했어."

친구: "왜? 괜찮은 회사였는데..."

나   : "음~~, 그게~~, 출근 하루 전날 틀었어. 가기가 싫더라고. 덕분에 지금 요 모양 됐다"


친구: "니가 옳은 선택 한 걸지도 몰라. 학교에서 하던 거 계속하는 거지?"

나   : "뭐, 비슷해"


친구: "난, 이게 하고 싶은 건 줄 알았어. 카피 쓰고 광고 만들고... 이런 거"

나   : "........?"


친구: "근데, 회사에 와서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하고 많이 다르더라, 

위에서 욕먹고 밑에서 욕먹고 클라이언트한테 까이고... 

나   : "음~~~"

친구: "그중에 뭐가 제일 힘든 지 아냐?"

나   : "뭔데?"


친구: "쓰기 싫은 글 억지로 쓰는 거야, 그것도 몇 번이나 고친 글 처음부터 다시 쓰는 거,

머리 빠진 거 보이지? 나 벌써 혈압약도 먹고, 당뇨도 생겼어 이게 말이 되냐?


나   : "음, 그래도 하고 싶던 거 하는 거잖아"

친구: "내가 하고 싶던 게 뭔지 기억도 안 나, 그런 거 생각할 틈도 없어." 

나   : "너 글 쓰기가 취미였잖아. 취미를 직업으로로 가지면 좋은 거 아냐?"

친구: "난, 이제 취미가 직업이 되는 거, 반대야!"

나   : "그래? 왜?"


친구: "취미가 직업이 되면 취미도 잃고 직업도 잃어"

나   : "오호~~, 카피라이터 포스~! (ㅎㅎㅎ)"

친구: "웃지 마, 웃을 일 아니야~~~, 취미든 뭐든 돈벌이로 하는 일은 즐거울 수가 없어"

나   : "그래도 사람들은 취미가 직업이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잖아"

친구: "그건 지들이 안 해봐서 하는 소리지,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어떻게 즐겁냐? 

전쟁이 즐거우면 미친 거지!"

나   : "음~~"


친구: "사는 게 행복하지가 않아. 여유롭지도 않고, 예전에는 쓸 때는 힘들어도 쓰고 나면 좋았거든, 

근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쓸 때도 괴롭고 쓰고 나면 더 괴로워. 직업이 되니까 모든 게 힘들어"

나   : "......" (너 많이 지쳤구나)


아주 오래전에 했던 대화다. 지금은 그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그때 말로는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사 그만두고 잠깐 요양할 거라 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프로젝트 끝나면 이라고.....


내 주위에는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이 많다. 

그중 자기 일에 만족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친구의 말처럼 모두가 그저 그런 생활인이 될 수밖에 없어서인가보다.


나는 '취미' = '재밌는 일(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재밌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재밌는 일만 하고 살겠는가, 

세상에는 꼭 해야만 하는 재미없는 일이 더 많다. 

이런 삶 속에서 그나마 한둘 있는 재밌는 일을 없애며 사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 맛이 좋아야 한다."

(ft 김창옥, 행복에 대한 강의 중)


인간은 재밌는 일을 할 때 시간을 짧게 느낀다. 

일이 끝나고도 즐거움이 여운으로 남으면 그게 행복이라는 말인 것 같다.


사흘간의 '쓰기 싫은 글' 쓰기를 끝내며 옛 친구 생각이 났던 것은 

나의 사흘간의 노력이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지겨웠고 끝 맛이 좋지도 않지만 그래도 끝냈다.

살아야 하니까....


모든 걸 끝내고 컴퓨터를 끄려는데 글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13년째 버리지 못하고 넣고 다니는 책에 예문으로 소개되어 있는 글이다.

아마도 친구가 했던 마지막 말과 오버랩 되어 떠올랐나 보다.


잠들기 전에 생각나서 필사해서 붙인다.




대학 때 소설을 써보겠다고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으며 두문불출한 적이 있지만 일주일 후 나는 미련 없이 취업 원서를 넣고 양복을 맞추러 다녔다. 28년 동안의 꿈을 단칼에 베어 버린 채, 나는 복제된 스미스 요원이 되어 '그저 회사원'으로 대한민국 일반 남성들의 삶 속으로 섞여 버렸다. 그리고 마치 자기 학대를 하듯 CD와 DVD를 사 모은다. 결국, 그저 그런 월급쟁이가 되어 무언가를 끝없이 사 모으는 허다한 소시민으로 제 인생을 마감하는 게 전부일뿐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하긴 그래, 나는 언제나 최고의 행복보다는 덜 불행한 길들 만 택하며 살아왔었지, 시시한 청춘이다.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나는 비록 가난했으나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사람이었지만, 월급쟁이가 된 나는 돈이 생겼지만,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끝없이 복제되고 있는 대한민국 스미스 요원들이여. 당신들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김준,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 2007" 중 발췌, 필사)




덧) 

'스미스 요원'은 20세기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매트릭스(Matrix, 1999~2003)'에 나오는 인물이다.

시리즈 3편에서 끝없이 복제된 '스미스'가 주인공 '네오와 싸우는 장면은 영화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청첩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