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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y 26. 2023

[보홀 이야기] #02. 너무 쉬운 충고

"이전에 실패했으니 또 실패할 거"

새벽 1시에 세부 막탄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직항이 다섯 대는 넘어 보였다.

"벌써 세상이 이렇게 변해 있었구나" 솔직히 좀 많이 놀랐다. 

내 가방에는 거의 100개 가까이 되는 마스크가 있다. 

이전에 여길 떠날 때는 마스크가 부족해서 큰 골치였기에 충분히 준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내리고 보니 같이 내린 한국인과 공항 직원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막탄 공항에는 마닐라에서 나보다 몇 시간 먼저 세부로 내려온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멋진 일을 해낼 것처럼 큰소리를 치고 10개월쯤 전에 한국을 떠났는데 고작 6개월 

만에 쫄딱 망해서 자금을 마련하러 마닐라 카지노에 취직을 하러 갔었다. 몇 달 일해서 

돈을 만들었다며 내가 오는 날 맞춰 세부로 내려온 것이다.


공항 근처의 레지던스에 숙소를 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답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서로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걱정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친구는 두툼한 현금 뭉치를 보여주며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내 보기에 그 돈으로는 두 달도 버티기 힘들어 보였는데 그는 자신 있는 눈치였다. 

 다음날 아침 친구는 원래 자기 근거지인 산속으로 돌아가고 나는 호텔에 남았다.


그는 세부에서 농사를 짓는다. 

"필리핀에서 무슨 농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농사꾼 입장에서 보면 필리핀은 

황금어장이라고 했다.  


농사지을 땅과 노동력을 싸게 구할 수 있고 경쟁자가 없어 매우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농산물을 현지에서 생산할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이라고 했다. 

뭔가 사기꾼의 향기가 짙게 풍기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신념이 있었다.


7년 전 전재산을 들고 필리핀으로 넘어와서 농사를 시작했는데 보다시피 지금은 쫄딱 망해서 

빌어먹는 신세가 됐다. 펜데믹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거의 1년 넘게 내게 빌붙어서 

생활비를 타 쓰고 농사 비용을 빌려갔었다. 물론 아직 한 푼도 갚지 않았다. 객관적인 사실로만 

보면 너무나 뻔뻔하고 파렴치한 놈이지만 동생이 없어서인지 넉살에 혼이 나간 것인지 나는 

이 친구를 내칠 수가 없었다. 팬데믹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취직도 내가 알선해 줬었다. 


내가 세부를 탈출한 몇 달 뒤에 이 친구도 나왔는데 거의 산송장이 된 채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도 한국에 도착했을 때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서울에서 다시 재회했을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다. 패잔병의 해후라고 할까? 노숙자 둘이 낙원상가에서 만나 한심한 듯 쳐다보며 

순댓국을 먹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부에 도착한 이틀째 되는 날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전화에서는 아픈 소리만 들렸다.


"한국에서 잘 사는 거 같더니 여긴 왜 또 들어왔냐?"

"그 나이 먹고 여기서 또 뭘 시작할 생각을 하다니 재정신이냐?"

"전부 형처럼 맘먹고 들어왔다가 석 달도 못 버티고 다 나갔어요."


"여기가 말이죠. 생각처럼 쉬운 곳이 아니에요."

"형, 예전에도 여기서 실패해 봤잖아 그런데 여길 또 와?"

"예전에 형 망할 때 전부 하지 말라고 말릴 때 안 들어서 어떻게 됐어? 기억 안 나? 

쫄딱 망해서 도망자 신세였잖아. 그때하고 지금 뭐 다를 거 같아?"

"남들 다 실패해서 나가는 데 넌 뭐 별수 있을 거 같냐? 


사람들은 타인에서 너무나 쉽게 충고를 한다. 

나도 여기서 산 세월이 그리 짧지 않은데 내 삶을 너무 쉽게 평가한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더 가슴이 아프다.


몇 개월 먼저 태어나 ‘형’이나 ‘선배’라는 호칭이라도 얻었거나 물질적으로 

여유라도 있으면 거의 자신의 말이 진리인양 떠들어 댄다.


정직한 충고라면 이런 말은 안 붙여야 한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걱정돼서 하는 소리예요. 내 맘 알죠?"

"난 분명히 말렸다."

"나니까 이런 말이라도 해 주는 거야, 새겨 들어"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안부나 물으려고 했던 전화에서 허탈과 체념의 소리만 들었다. 

이전에 실패했으니 또 실패할 거라는 말이 제일 아팠다.


한 밤 중에 전화를 끊고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나갔다.

그냥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계산대에 올려놓고 직원을 바라보는데 붉은색 '말보로'가 눈에 들어왔다.  

끊은 지 2년도 넘었는데 은은하고 고소한 향기가 뇌리에 피어오른다.  

빨간색 뚜껑에 있는 예쁘장한 흰색 삼각형 무늬를 한참 째려보다 돌아섰다.


"젠장, 2년이 긴 시간이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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