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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y 29. 2023

[보홀 이야기] #04. 또 가이드를 하겠다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 분명함.

"형, 이거 하나만 해주고 가"

"야! 난 여기 길도 모르고 인스펙션도 안  있는데 어떻게 행사를 하냐?"


"형, 그런 거는 애들이나 하는 거고, 형 같은 프로는 옵션샵 번호 몇 개 가지고 시작하면 돼요."

"야! 내가 원래 가이드를 잘했던 사람이 아냐."

"그런 말 하지 말고 하나만 해줘요."

"........"


"좋은 팀 내가 뽑아서 주는 거니까 수입 괜찮을 거야. 칼라 좋다니까."

"생각해 볼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니까? 당장 이틀 뒤 어라이발이야. 그냥 하면 돼"

"쩝~~"


알로나 비치 근처 식당에서 후배 나눈 대화이다.




세부 남부터미널을 출발해서 오슬롭 고래상어 포인트에서 두 밤을 자고 투말록,

수밀론을 거쳐 모알보알로 가는 길에 보홀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고, 언제 들어오셨어요?"

"나흘 쨉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보홀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전에 막탄에서 C사장님을 만났더니 보홀에서 가이드하신다고."


"헐~ 그 인간이 나 보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막탄에서 만났던 사장과는 앙숙인 관계다)

"여기 좁잖아요. 어떻게 가이드는 좀 할만합니까?"

"아직은 그럭저럭입니다." (이 정도면 아주 잘 된다는 소리?)


"저도 세부 한 바퀴 돌고 나면 보홀 구경도 한 번 갈까 합니다."

"아! 오세요. 식사 한 번 하시죠.

"네 그러시죠. 넘어가는 날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오세요."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모알보알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 할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누구신지?"

"푸하하하~, 형 살아 있었네. 나 R이에요."

"으잉? 니가 어떻게 전화를 했냐?"

"어제 XX하고 통화했죠? 저녁에 만났는데 형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보홀로 넘어오신다면서요. 언제 오시게?"

"내일이나 모레쯤?"

"그냥 오늘 넘어와요."

"왜?"


"할 일 있어, 그러니까 시간 끌지 말고 오늘 중으로 배 타요."

"나 모알보알 가는 길이야, 지금 버스야.."

"됐고, 최대한 빨리 배 타."

"뭐가 그리 급한데?"

"나쁜 일 아니니까, 빨리 넘어와. 믿어도 돼"

"헐~~~"


이렇게 해서 나는 바로 세부로 향하는 버스표를 끊었다.

저녁 늦게 세부에 도착해 짐을 챙기고 다음 날 아침 보홀 가는 배를 탔다. 



나는 보홀을 10년 넘게 드나들었지만 언제나 하루 일정의 '데이투어'만 했었다. 

그래서 솔직히 보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세부에서 가장 인기 옵션 중 하나가 '보홀 데이투어'이다. 

이 상품 때문에 세부 가이드들은 한 달에 한두 번은 보홀을 다녀와야 한다. 

하지만 세부 가이드가 '보홀 데이투어' 때 가는 곳은 보홀의 핵심 관광지인 

팡라오섬의 '알로나 비치' 쪽이 아니라 보홀 본 섬이다.


그러니 '보홀 데이투어'와 '보홀 패키지'는 럭비와 미식축구만큼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당장 이틀 뒤에 들어오는 보홀 패키지팀을 맡으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디 순서가 있던가.

헤난 리조트 앞에서 본 알로나 비치


이 바닥은 사기꾼과 친구가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얼굴이 두꺼울수록 이 바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비즈니스와 사기는 한 끗 차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좋아서 가이드를 했었다.

이게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인지 설명하긴 힘든데 어쨌든 그랬다.

일정을 모두 끝내고 공항에서 헤어질 때 만족감에 빠져 아쉬워하는 손님을 

보는 건 가이드로서 큰 보람이었다. 그 느낌 덕에 오랫동안 가이드를 했다.

그런데 보람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이드는 회사 입장에서도 직업인으로서도 실격이다.

빈곤함이 주는 고통이 삶의 보람이 주는 즐거움을 위협할 때쯤 나는 이 바닥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5년 넘게 연락이 없던 친구가 갑자기 보홀의 팀장이 되어 도와달라고 연락을 하고,

또 그걸 넙쭉 받아서 나는 그 일을 하러 나선 것이다.


보홀로 가는 배에서 생각했다.

"딱! 6개월..... 6개월만 한다."

"뒷 일은 뒤에 다시 생각하자."

"인간이 살면서 6개월 정도는 돈 못 벌어도 재밌는 일 하면서 살아도 되잖아."

"죽을 만큼 힘들었던 지난 4년 간의 보상이라 생각하자."


이렇게 자기 합리화로 마음을 다잡고 보홀에 첫 발을 디뎠다.

"젠장 내가 또 가이드할 생각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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