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기(間節氣)
'배신의 계절'이 돌아왔다.
관광객 숫자가 줄어들면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 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잖아요."
"나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런 말이 주위에서 슬슬 들려오기 시작한다.
"잘 되면, 잘해줄게. 좀만 기다려..."
이 말은 한국인이 일하는 곳에는 다 통하는 말인 듯하다.
어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보홀 담당 과장이 회사를 떠났다.
특별히 말도 없이 갑자기 회사 단톡방에 '퇴장하셨습니다'가 뜬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가이드 방'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떴다.
회사 단톡방이야 그렇다 쳐도 가이드 톡방은 개인적으로 사담을 나누는 곳이라
웬만해선 나가지 않는다. 여기서 나갔다는 뜻은 다시는 얼굴을 안 보겠다는 말이다.
개인 톡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정리되면 연락해. 언제든지...."
다음날 이런 톡이 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네요. 용도가 끝난 거죠 뭐..."
몇 시간 뒤 한국에 휴가 가 있던 오피스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저기, 지난번 배정표... 어쩌고 저쩌고..."
"제가 가진 거 다 보내드릴게요. 정리되면 연락 주세요."
"가이드 님은 거기 계속 계실 거죠?"
"전 여기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가이드 님"
얼마 후 각종 서류 파일들과 자질구레한 오피스 업무들이 톡으로 날아들었다.
"죄송하지만 서류 업무 조금만 도와주세요."
"네"
다음날 세부에 있는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별일 없으시죠?"
"네, 너무 없어서 탈입니다."
"허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번 달 말에 홈쇼핑.... 어쩌고 저쩌고"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가이드 단톡방에 이제 3명만 남았다.
그중 한 명은 세부로 돌아갔는데 아직 보홀 톡방에서 빠져나가지 않았고,
날 끌어들였던 팀장은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세부로 불려 가서 근신 중이다.
보홀에 오피스 직원이고 가이드고 통틀어 혼자 남았다.
스탭 하우스 겸 오피스로 쓰던 방에서 프린터를 가져와 내 방에 설치했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 A4용지와 서류철들로 더 엉망이 됐다.
바우처와 확정서 같은 서류들과 피켓을 정리해서 용병들에게 나눠주고
정산서를 정리해서 세부 사무실로 보냈다.
이 바닥은 배신 전문가들이 만드는 세상이다.
끝까지 책임지면서 함께 일하는 그런 영화 같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늘 눈을 내리깔고 곁눈질로 대화하고 등뒤를 조심한다.
나같이 계산 느리고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은 살기 버거운 곳이다.
가끔은 내가 이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사실 살아남은 게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에는 계절이 바뀌는 중간에는 장마 같은 간절기가 있다.
이 바닥의 간절기(間節氣)는 비수기와 성수기 사이에 있는 '배신의 계절'이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매 년 돌아오는 이 간절기는 변하지를 않는다.
모든 배신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는 배신은 없다.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니 뭐라 하지도 않는다.
나도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간절기가 지나면 가면을 쓴 사람들이 또 모여들 것이다.
이런 일은 계절이 반복처럼 변하지도 않는다.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또 사라지고......
거의 자연의 이치에 가깝다.
뒤통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데 왠지 등골이 싸한 것이
벌써 맞았는데 나만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돈은 못 벌어도 일은 잘하잖아"
이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