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너무 커서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왔다.
여덟 시간의 여정 끝에 집에 도착했다.
겨우 10일 비운 집인데 집 앞에 도착하니 마음이 왜 이렇게 들뜨는지....
이래서 사람들은 "집이 최고"리는 말을 하는구나 싶다..
방문 앞에 며칠 전에 도착한 냉장고가 당당히 날 반겨준다.
주인집 Leo가 날 보더니,
"Hoon! Long time no see. Your Rep already here....."
"Thank you, Tnx a lot!!!"
냉장고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며칠 전에 들었다.
세부로 떠나기 전 아무래도 출장이 길어지면 문제가 생길 거 같아 돈을 주인집에 맡기고 갔었다.
참고로, 필리핀 온라인 쇼핑에는 한국에는 없는 "Cash on Delivery" 시스템이 있다.
아주 고가품이 아니면 배송맨이 물건 값을 받아가는 시스템이다.
신용카드나 전자화폐가 발달하지 못한 데다가 물건에 대한 신뢰가 없다 보니 이런 방식의
결재가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이 방식을 써보면 그리 나쁘지가 않다.
물건이 마음에 안 들면 물건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일단 시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출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돌려보낼 경우 배송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보홀에 방을 얻은 지 3개월 만에 냉장고를 샀다.
보통의 렌트 하우스들은 풀퍼니처가 많지만 로컬 주택이라 부르는 현지인 월세방에는
가구가 없는 곳이 많다. 그런 곳은 당연히 월세가 싸다.
내가 보홀에 얻은 집은 세차장 안쪽에 사장 가족이 사는 로컬 주택이다.
원룸 형태의 방에 침대 하나와 벽걸이 에어컨 플라스틱 서랍장이 구비되어 있다.
방을 보고 선뜻 계약을 하자 집주인은 내가 살림을 가지고 들어올 줄 안 것 같았다.
그런데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들어와 냉장고도 없는 집에서 에어컨도 켜지 않고
두 달 넘게 사는 걸 보고 참 신기한 한국인이라 생각했단다.
난 집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전부터 그랬다. 전기세 문제도 있지만 에어컨 바람이
싫어 선풍기로만 생활한다.
보홀이 세부와 다른 점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인정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혼자 살며 밥도 못 얻어먹고 있는 걸로 보였는지 주인집 안주인은 날 보면 먹을걸
자꾸 준다. 여기 이사 온 석 달 중에 벌써 가든파티만 세 번을 초대받았고 아침밥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바나나는 수시로 가져다준다.
솔직히 냉장고는 없어도 살만해서 안 산 것인데 안주인은 그게 안쓰러웠던 것 같다.
일이 많을 때는 밖에서 밥을 먹으니 냉장고가 필요 없었지만 요즘처럼 일이 끊어져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방에 자꾸 음식 쓰레기가 쌓였다.
다 먹지 못한 간식거리들이나 음료수 등은 냉장고가 없으면 보관할 방법이 없다.
싱크대 수납장도 없는데 냉장고마저 없으니 방이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다.
열대 지방에 살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긴 개미와 바퀴벌레와 도마뱀의 천국이다.
그래서 음식물을 외부에 노출시킬 수가 없다. 냉장고 없이 사는 건 극도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이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인터넷 쇼핑몰에 냉장고를 주문했다.
주문한 지 2주가 지날 때까지도 배송이 되지 않았지만 여기선 흔한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세부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할 수 없이 주인집에서 일을
돕는 Leo에게 냉장고 값을 맡기고 출장을 떠났다.
지금 냉장고 안에는 파파야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다.
안주인 어른이 열흘 만에 본 게 반가웠는지 아침에 마당에서 딴 파파야를 손에 쥐어 줬다.
그리고 냉장고 비싸게 샀다고 엄청난 타박을 했다. 내가 LEO에게 맡긴 돈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녁에 일 없는 가이드 몇과 저녁을 먹었다.
내 옆에 있던 둘이 이런 대화를 한다.
"형은 왜 다시 들어왔어요?"
"넌 왜 왔냐?"
"돈만 보면 한국에 사는 게 맞죠."
"돈 말고 더 뭐가 필요해서?"
"그게 말로 잘 표현을 못 하겠어요."
"여기 익숙해져서 그래"
"뭐에 익숙해졌다는 거예요?"
"그게 뭐랄까... 음.... 몰라!!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뭐가 있다는 거예요!"
"여기선 뭘 해도 편하잖아. 다른 사람 눈치 안 봐도 되니까"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유튜브로 음악을 켰다.
빗소리에 묻혀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양철 지붕에 비가 떨어지면 강렬한 소리 때문에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침대에 누워 한국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잠든 적이 있었나 생각해 봤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적이 있기는 했을까?"
방음이 잘 된 한국의 집에서는 빗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듯하다.
세부에서 날일로 몇 푼 벌어왔으니 이번 달 집세는 낼 수 있게 됐다.
다음 달은 보홀도 성수기로 접어드니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