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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선 Mar 24. 2019

꽃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글 쓰는 이유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간절해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온 경험이 있는가. 후라이드 치킨 껍질이 바삭하다고 감탄하거나, 미세먼지가 걷힌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중얼거리거나, 마음이 벅차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너무 고마워서 감사 인사를 했다거나.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어떤 감정과 생각을 말하고 싶어서 단어와 문장으로 옮겨 적는다. 말하기보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생각할 수 있고 기록해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하고 나면 머릿속에 새로운 단어들이 들어와서 독후감을 쓰곤 한다. 애정을 갖고 읽은 책은 바로 써지는 반면, 억지로 읽은 책은 글이 써지지 않는다. 정혜신 작가님의 <당신이 옳다>를 읽고 느낀 감동과 공감에 대한 경험을 얼른 얘기하고 싶어서 바로 블로그에 올렸지만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는 어려워서 리뷰를 몇 달째-혹은 영원히- 임시 저장해두었다. 주제에 대해 생각이 정리되어야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매주 느낀다. 글을 쓸 수 있는 만큼 내 생각이 완결되었구나 알 수 있다. 글쓰기는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이기에 글을 쓰면서 내용이 드러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로 규정한다면, 존재는 그 언어 안에 거주하는 것'이라고. 언어라는 장소가 있어야 존재가 그곳에 있을 수 있다. 집 크기가 얼만한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그 안에는 어떤 존재들이 있는지 언어를 읽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쓰는 언어만큼 우리는 세상을 인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인지하지 못하는 걸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와 세상이라는 존재를 얼마큼 어떻게 인식하는지 글을 쓰면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절대와 같은 단정적인 단어를 쓰는지, 소재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따뜻한 에세이인지, 사회 이슈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칼럼인지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성향이 느껴진다. 어느 정도 길이까지 쓸 수 있는지 사유의 깊이를 볼 수 있고, 논리 전개가 매끄러운지 비약하고 일반화하는지 사고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막연하게 살쪘거나 빠졌다고 느끼다가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재고 숫자가 나오면 더 정확히 알게 되듯이 스스로 글을 쓰고 읽으면 와 닿는다.


 글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세계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행위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를 꽃이라 이름 부르자 그는 꽃이 되었다. 그처럼 내 언어로 세상의 존재들을 부르고 싶다. 지금 쓰지 못하는 단어를 배워서 더 많은 존재를 알고 싶다. 쓸 수 있는 언어만큼 사고가 확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진 걸 표현하기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흘러가는 원리를 이해하려고 글을 쓴다. 다시 말해 내가 글 쓰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얼마큼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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