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제타(1999)'와 '거인(2014)'을 보고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삶이 힘들 때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꽤 자주 책에서 답을 읽었고 영화에서 답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새부턴가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겨났다. 말 그대로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책과 영화에도 삶의 시련과 피로가 즐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급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 책들, 위로는 둘째치고 그 자체로 힘들다는 영화들. 그야말로 답이 없는 이야기들. 이런 아픔도 있구나 숨이 턱턱 막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들. ‘로제타’와 ‘거인’ 역시 그러하다. 삶에 말라가는 로제타와 영재는 힘들다는 말을 할 힘도 없다. 그냥 영화 자체가 온몸으로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삶이 힘들다고 영화를 볼 수만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와 영재를 보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받았다. 몸을 팔아 술 한 병을 얻는 알코올중독자 엄마와 컨테이너에서 사는 로제타와 스스로 집을 뛰쳐나와 천주교 시설에 사는 영재. 덜 힘들다, 더 힘들다는 비교는 무의미하다. 그저 각자의 버거운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로제타의 힘든 인생을 관찰하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 힘듦이 되지는 않았다. 친구도 없고 좋아하는 음악도 없는 로제타가 ‘평범한’ 삶을 꿈꿀 때 그를 다독이고 싶었다. 할 수 있다고. 그렇게 간신히 생긴 친구가 나의 일자리를 빼앗는 적이 되었을 때, 그래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그 아이를 선뜻 구하지 못할 때 그럴 수 있다고 로제타에 공감했다. 도저히 삶을 견뎌낼 수가 없어서 가스를 열고 자살을 기도할 때도 로제타가 너무너무 안타까웠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로제타는 희망과 좌절의 반복이었고 그 속에서 로제타가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긴 했지만 분명히 영화 내에서 희망들이 있었다.
그러나 ‘거인’은 아니었다. 영재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100분의 러닝타임을 끝내는 게 고역이었다. 영재의 삶에 희망은 없었고 절망의 원인은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로제타는 기본적인 생활력이 있었지만 영재는 철저히 생활력이 없는 상태였고 시설의 물건을 훔쳐 파는 일종의 도둑질 역시 자신의 안위를 걸고 하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아이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신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또 신부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평범한 삶으로서 철저한 금욕의 천주교인을 꿈꾼단 말인가.
어딜 가든 네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 너보다 불쌍한 사람들 널렸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나보다 더 불행한 타인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불행과 비교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 나의 불행과 너의 불행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불행 간의 비교로 우리가 얻는 것은 전혀 없다. 그렇기에 타인의 불행으로 위안을 얻으라는 위로는 얼마나 얄팍한가. 로제타의 삶도, 영재의 삶도 불행했지만 그 아이들이 불행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무능력한 부모도 아니고 일자리를 빼앗는 사장도 아니고 수시로 안위를 위협하는 시설 원장도 아니다. 그래서 무섭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그래서 지금의 아픔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아픈 아이는 그저 쓰러져 죽고 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