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영원한 익명, 그를 기억하며

위대한 비밀 (Anonymous, 2011)

by 효신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유럽 배경(보다 정확하게는 영국 배경이긴 하지만)의 시대극을 정말로 정말로 좋아한다. 그 시대의 의복, 건축, 생활 양식 같은 것들이 영화상에서 묘사되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래서 오만과 편견은 영화의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없이 매력적인, 시대극 영화에서 언제나 내 최고의 작품이고, 최근에 본 너무너무 좋았던 시대극으로는 프란츠, 남아있는 나날, 스윗 프랑세즈 등이 있다. 시대극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와 장황한 대사 없이 승부하는 눈빛 연기들.. 이런 나에게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위대한 비밀'은 결국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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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 관한 음모론을 다루는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가 작중 주요 인물이 아닐뿐더러 그를 꽤 경박하고 세속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덕분에 문학을 향한 에드워드와 주변 인물들의 열정이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애매한 재능도 비극이지만 감당할 수없이 과도한 재능 역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진 주인공 '에드워드 드 비어'(리스 이판 역)는 문학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귓가를 맴도는 인물의 목소리를 종이에 옮겨 적지 않으면 미쳐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둘러싼 온갖 사람들, 지위, 사회적 배경은 그를 문학과 함께 마냥 행복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장인 윌리엄 세실은 '신분에 맞게 행동하고, 지위에 따른 책임을 다하라'라며 에드워드를 옥죄어 왔다.


All art is political. Otherwise, it would just be decoration.


그러나 에드워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가 각자에게 하나씩 있다면 에드워드에게 그것은 곧 시를 쓰고 희곡을 쓰는 것이었을 테니까.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야. 아니면 장식일 뿐."이라는 에드워드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예술에 자신의 삶을 쏟아냈고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정치적 제약을 예술로 승화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탄생시켰고 세실 부자를 향한 증오는 '햄릿','리처드 왕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인생이 희곡이었고 그랬기에 창작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연극에 차분한 박수만 쳐대는 왕궁에서의 상영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연극을 통해 프랑스 군을 향한 분노의 함성을 지르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며 방황하는 햄릿의 고뇌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관객들, 그들만이 에드워드의 연극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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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 is a quality I have unfortunately never possessed.



에드워드의 인생이 담긴 그 소중한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빌려 비로소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나로서는 작품의 진가도 모르는 경박한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영화 속에서 묘사된 모습으로는 그러했다) 에드워드가 받았어야 할 박수갈채를 앗아가는 것이 내심 불편했다. 그러나 그러한 박수와 환호에 에드워드가 연연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예술을 천시하는 가문과 신분상의 제약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드워드의 고달픈 인생은 단순히 타인의 찬사로는 복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 법한 비극'같은 자신의 인생이 담긴 작품들을 '그깟 시 따위만 써댄다'거나 '당신은 그저 자신만을 생각한다'라는 비난을 서슴없이 에드워드에게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어쩌면 자신의 작품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또 다르게, 셰익스피어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에드워드의 작품을 감당할 자격이 없었다. 당신의 이름으로 시집이 출간된 것을 축하한다는 에드워드에게 셰익스피어는 시집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책 같은 거요?"라고 묻는다. 이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에드워드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며 망설인다. 이런 자의 이름으로 내 작품이 알려져 있나라는 자괴를 내보이며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차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었다. 지혜는 애석하게도 내가 가져 보지 못한 자질이었다, 는 그의 말에서 미약하게나마 그의 마음을 느껴볼 뿐.



I find your words the most wondrous heard on our stage.
On any stage. Ever.
You are the soul of the age.


결국 에드워드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에드워드 스스로 선택한 벤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벤에게 내가 받고 싶은 찬사는 오직 당신의 것이었다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벤의 견해를 묻는다. 이에 벤은 에드워드의 작품이 그 어떤 무대의 그 어떤 작품보다 경이로운, 이 시대의 영혼이라는 지극한 찬사를 보낸다.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전달할 적임자로서 선택한 벤에게 이와 같이 정성 어린 찬사를 들은 에드워드는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을까. 고되고 지난한 인생이었지만 그 인생을 향한 벤의 찬사는 에드워드의 인생을 무엇보다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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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n? Dishonour?
You, your family, even I,
even Queen Elizabeth herself will be remembered solely
because we have the honour to live
whilst your husband put ink to paper.



우리나라에 '위대한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는 'Anonymous(익명)'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셰익스피어도, 벤도, 온갖 희곡들도 아닌 '에드워드 드 비어'라는 사람이었으나 영화에서마저 차마 그의 이름은 밝힐 수 없었기에 그는 여전히 현대의 우리에게도 '익명'같은 존재이다. 그의 작품이 기록된 시대에 살았다는 영광으로 기억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그의 연극을 실제로 보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랑과 복수에서 휘청이는 햄릿의 고뇌에 함께 아파하며 폭풍같이 몰아치는 맥베스의 오열에 함께 눈물 흘렸을까? 시대의 불의에 함께 돌을 던지고 다시없을 비극에 숨을 멎는 사람 역시 우리이기를. 에드워드가 바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을 테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그에 관한 음모론, 혹은 시대적 배경에 흥미가 없다면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도입부는 굉장히 흥미롭지만 영화 초반이 다소 불친절하게 전개되어 도입부의 힘을 제대로 끌고 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나에게는 완벽한 영화였다. 요즘 너무 바빴던 탓에 보는 동안 여러 번 끊어가면서 봐야 했는데 그게 미안할 만큼 너무 좋았다. 불친절하게 나열되어 있던 퍼즐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세실과 에드워드, 윌리엄과 벤 등 인물 간의 대립, 긴장 관계가 점점 더 드러남에 따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에드워드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만큼이나 흥미로운 셰익스피어의 인생은 현대의 우리에게 이렇게나 많은 작품들을 선물해주고 있다. 에드워드 역을 맡은 배우 리스 이판Rhys Ifans의 연기 역시 단연 압권이었다. 에드워드는 한 번도 울지 않았으나 최근에 본 영화 중에 가장 슬펐다. 알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에서 꽤 많이 등장한 배우였다. 노팅힐이나 거울나라의 앨리스, 해리포터 등등. 매력 있는 배우.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보지 못한 것들 다 챙겨봐야겠다.


이동진 평론가는 한 영화에 대해 '살아서 영화를 보는 행복'이라는 코멘트를 남긴 적이 있다. 살아서 영화를 보는 행복. 앞으로도 많이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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