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머지않아'가 아직은 아니라서 미안해요

초콜렛 도넛 (Any Day Now, 2012)

by 효신

최근 영화계에서 '다양성' 담론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영화는 책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리의 삶에 깊이 파고들기에 영화 속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맞는 거기도 하고.


영화는 별다른 밑밥 깔기 없이 바로 하고 싶은 이야기로 직행한다. 루디와 마르코가 이웃으로서 예전에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바비 인형이 마르코 것임을 루디가 알고 있는 정도라는 것. 그래서 혼자 남겨진 마르코를 루디가 앞뒤 생각해 보지 않고 당장 집으로 데리고 올 때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루디의 행동에 대해 납득할 만한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부모 없이 혼자 남은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 아이의 문제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루디는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은, 그리고 나는 그의 행동에 근거를 요구했다. 마치 당신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다운증후군인 마르코를 기르기 전, 의사는 루디와 폴에게 다운증후군 아이를 기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일종의 경고를 한다. 아이가 가져다줄 고난과 역경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마르코의 부모가 되기 위해 폴과 루디가 겪은 모든 고통은 마르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르코는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이었다. 숨을 참으며 아이의 손짓 발짓에 집중하기도 했고 아이의 미소에 그들의 모든 피로가 녹아내렸다. 폴과 루디를 힘들게 한 것은 그들을 향한 타인의 시선이었다. 마르코를 키우기 위한 법정 공방을 지속하면서 검사였던 폴은 직장마저 잃었다. 그가 업무에 태만했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폴이 해고되기 전, 직장 상사는 폴에게 검사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폴은 정말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가 검사의 품위에 먹칠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된 것이다.


SE-736e470a-268a-4e4a-a2e5-d0ac8a481c89.png


마르코의 영구 양육권을 향한 재판에서 마르코는 없었다. 그 재판은 동성애자 커플인 폴과 루디를 향한 인신공격이었으며 그들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까발리는 것에 불과했다. 아동복지국 쪽 변호사는 양육권 분쟁이라면 으레 언급될, 아이가 부모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했는지, 부모가 아이를 위해 어떤 양육 환경을 조성했는지 같은 것은 전혀 묻지 않았다. 그는 마치 폴과 루디의 '동성애'가 더러운 것이며 행여 마르코가 오염이라도 되는 것은 아닌지, 폴과 루디가 그 더러운 것을 마르코에게 얼마나 전파시켰는지 재차 확인하고 강조했다. 루디가 증인석에 앉았을 때 그를 향한 변호사의 인신공격과 모욕은 보는 나로서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디는 마르코를 위해, 마르코를 만나기 위해, 마르코의 부모가 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참아냈다. 폴 역시 10년 넘게 공부하여 어렵게 된 검사였지만 마르코를 위해 검사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이를 사랑하는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모의 안정된 애정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아이의 정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폴과 루디가 마르코 앞에서 키스했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연인이기에 당연히 키스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든 애정 표현은 아이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끼칠 수 있다며 매도 당한다. 마르코가 폴, 루디와 함께한 이래로 건강도 훨씬 나아졌으며 사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전문가의 증언이 있었음에도 아동복지국은 폴과 루디가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며 아이의 마약 중독자 부모에게 아이를 맡겼다. 마약 중독자로서 구치소에 가면서 아이를 버렸던 부모에게 다시금 아이를 맡기는 것이 어떤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결론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아이를 부모의 직장에 데려가는 것은 절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외려 부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이가 바로 인식할 수 있게 하며 사회 활동에 대한 아이의 관념을 길러줄 수 있다. 그러나 아동복지국 변호사는 루디가 자신이 일하는 게이바(그것도 심지어 영업이 끝난 게이바였다)에 데려갔다는 점을 심하게 조롱한다. 이 모든 것을 참아낸 루디가 그저 대단할 뿐.


SE-ebff39b3-157d-4e17-af27-30f3103c0072.png


간단한 문제였다. 마르코의 양육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으니 그 순간만큼은 마르코를 위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법정의 모든 이들이 폴과 루디가 얼마나 부모로서 부적절한 지만을 생각했다. 마르코가 그들과 함께 진정으로 행복했으며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폴과 루디, 두 명의 아빠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무시했다. 사랑하는 아빠들과 떨어진 아이는 그들에게 가기 위해 길을 헤매다 길 위에서 죽었다. 아이는 자신을 본 적도 없던, 자신의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던 이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 폴과 루디에게 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한스러울지, 마르코의 죽음을 알고 나서 얼마나 큰 비통함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성적 자유가 타인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무시당하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얼마나 무력해질까.


SE-378f5c6b-e748-4b2f-a7a2-f0334772d5d2.png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70년대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임을 알게 됐다. 영화의 원제는 'Any Day Now', '곧, 조만간'이라는 의미이다. 영화를 다 본 후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70년대임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직도 마르코의 행복이 곧, 조만간 있을 일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마르코가 원한 것은 그저 한 조각의 초콜렛 도넛과 해피 엔딩뿐이었는데 소박한 꿈마저 이렇게나 어렵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픔의 연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