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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Sep 10. 2023

강에 빠지는 여자들

효구 단편선 제1권

   

  미미는 책상에 앉은 채 상체를 동그랗게 말고 엎드린다. 팔꿈치는 책상 위에 고정시킨 채 양 손으로 숱 많은 초록색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안 그래도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다. 가장 좋아하는 코발트블루색 반다나를 이마에서 끄집어내어 빼버린 후 미미는 일부러 머리칼을 더 헝클어뜨린다. 미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자에 똑바로 기대어 앉아 본 적이 없다. 대신 반다나에 감싸진 이마를 책상 위에 바짝 대고 상체를 누인다. 머리통을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는다. 미미의 애인은 침대에 누운 채로 괴로워하고 있는 미미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 내 모습 어때?”

“궁지에 몰린 벌레 같아.”

“무슨 벌레?”

“음 좀 가련한 종류의 벌레. 뭐가 있을까? 귀뚜라미?”

“귀뚤 귀뚤 귀뚜라미?”

“응. 귀뚤 귀뚤. 귀뚜라미 우는 소리 들으면 좀 울적하지 않아? 가을 밤 추수를 앞 둔 벼 밭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귀뚤 귀뚤 우는 귀뚜라미.”

   

   애인은 마지막에 노래하듯이 귀뚤 귀뚤 우는 귀뚜라미. 한다.


“그렇긴 하네. 귀뚤 귀뚤 소리가 좀 가엽다.”

“그렇지? 귀뚤 귀뚤.”

“좋은 노래가 될 수 있겠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귀뚤 귀뚤 우는 귀뚜라미.”


   귀뚤 귀뚤 하고 조금 뜸을 들인 후 미미는 말한다.


“식물은?”

“식물이 뭐?”

애인은 못 알아듣는 체한다.

“식물은 무탈한가?”

“응. 그럭저럭.”

미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 솔직하게 말해줬더라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올가가 올 거야.”


   애인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삐죽빼죽 웃으려다가 말았다가 다시 웃으려고 한다. 애인은 묻는다.

“진짜 가려고?”

미미는 대답하지 않고 애인을 가만히 본다.

“스노쿨을 챙겨야 해.”

“오리발도 필요하지?”

“벽장에서 꺼내 줄래?”

애인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다. 미미에게 보란 듯이 심술 난 입매를 삐죽거린다.


   후두두두두.

이 소리는 뭐지? 미미와 애인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잠시간 서로를 바라본다. 후두두두두.

“이게 무슨 소리야?”

“비가 오는 소리인가?”


   미미는 책상에 꼼짝 않고 앉은 채 애인을 향해 뒤 돌아본다. 애인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주방을 지난다. 걸음걸이가 점점 더 느려진다. 애인은 거실을 지나 베란다 앞에 선다. 짙은 청록색의 커튼은 종종 이 집을 비 내리는 밤의 어둡고 습한 숲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천천히 커튼을 열어젖힌다. 커튼 바퀴가 커튼레일 위를 타는 소리가 들린다.

   둘은 빗소리를 확신한다. 애인은 베란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다. 애인은 요란하게 내리는 장대비의 치열한 하강을 바라보고 있다. 거처를 덮는 이 축축한 전조를 애인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치 느닷없이 들이닥친 낯선 손님처럼 비가 억척스럽게 사방을 장악한다. 커튼을 젖힌 탓에 집 안에 들어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미미는 트렁크 한 장을 걸치고 서 있을 애인이 추울 것 같다.


“보일러를 좀 올릴까?”

   애인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천천히 미미의 방으로 돌아온다. 장난을 치려는 건지 한쪽 발을 건들거리며 툭툭 미미를 건드린다. 그 모습을 보니 미미는 좀 귀뚤귀뚤하다. 미미는 안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애인의 눈빛을, 혀를 날름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작은 두 눈이 반달이 되도록 눈주름을 만들어 웃는, 동공 깊숙한 곳을 세게 사로잡는 동시에 마음 부스럼처럼 군데군데 덧난 상념을 와르르 부수는, 이토록 생경한 애인의 실체를 느껴보다가도 다시, 머지않아 부재할 그의 빈자리, 그 텅 빈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을 상상한다.

   미미가 떠나기 전 애인은 자리에서 꼼짝없이 벗어나지 않고 있는 미미의 뒤에 선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그를 꼭 안아준다. 그리고 정수리에 한 번, 어깨에 조심스럽게 한 번 키스한다. - 날갯죽지를 조심해야만 한다. - 애인은 침대 아래에 뱀 허물처럼 버려져 있는 발목까지 길게 올라오는 네이비색 양말 두 짝을 찾아낸다. 애인은 늘 바지를 입기 전에 먼저 양말을 신는다. 애인은 가장 외로운 것들을 잘 알아차린다. 그것은 양말이다. 애인은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떠나기 직전에 어떠한 눈빛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꽃, 꽃, 꽃이 피었네.”

자기가 만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애인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미미는 애인을 떠나고 싶지 않다. 미미에게 애인을 떠나보내고 싶은 순간은 절대 없다. 미미가 올가가 올 거야라고 말할 때 애인은 아래로 뚝 늘어뜨려져 구슬픈 눈꼬리를 만든다. 애인의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아래로 축 처진 어깨가 말한다. 둘 데 없이 흔들리는 시선이 말한다. 올가가 오기 아주 전부터 애인은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미미가 떠나면 애인은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계절이 빠르게 흩어져 초록 잎사귀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마치 초록을 검게 그을려 놓은 듯 어두운색의 숲처럼 축축한 밤거리일지라도 애인은 무성하게 떨어진 잎사귀를 밟아 길 위를 걷고 또 걷는다. 초록의 길 위에서 애인의 구두는 낡아 버리고 만다. 미미가 애인을 위해 흙먼지를 털고 기름 광을 내어 준 구두는 어느새 짓이겨진 초록에 물들어 낯선 물건이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잃어버려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익숙하지 않은 창고의 무엇들처럼. 베란다에 내다 버려진 텅 빈 화분들처럼.

미미는 두렵다.

“꽃, 꽃, 꽃이 죽었네.”

미미가 작게 중얼거린다. 애인이 웃는다.

“내 소중한 꽃을 잘 보살펴 줘.”

“꽃 말고 허브도 있고 다육도 있고 바다에는 미역도 있고.”

“꽃, 꽃, 꽃이 피었네. 해야 아름답지.”

“아름답지 않아도 다시 올 거니?”

애인은 떠나고 없지만 미미는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야. 강에서 빠져나오면…….” 애인은 떠나고 없다.


*


   어려서 미미의 날갯죽지에서는 싹이 돋았다. 자신의 날갯죽지에는 없는 것들이 어린 자식의 몸에서 자꾸만 생겨나서 미미의 부모는 근심이 많았다.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그들은 아기를 신망이 두터운 신부에게로 데려갔다.

“신부님, 우리 아이에게서 자꾸만 풀이 자라납니다.”

   이제 막 고해소에서 빠져나온 신부는 아주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부에게서 고해 성사를 받은 어떤 신자가 도망치듯 성당의 출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음질쳤다. 신부가 딸깍. 고해소의 불을 끄자 그 신자는 성전을 영영 떠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신부는 어린 미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후 천천히 미미의 부모의 머리에 차례로 손을 올려 축복해주었다.


“아름다운 아기로군요.”

그 후로 미미의 부모는 아기에게 미미(美美)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밤 정성스럽게 물로 씻겨 주었다. 미미는 그의 날갯죽지에서 자라는 초록 풀처럼 건강하게 성장했다. 가끔 붉은 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미미의 부모는 뛸 듯이 기뻐하며 미미의 꽃을 위한 화분을 준비했다.

미미의 아버지는 미미를 위해 그릇을 만드는 곳을 찾았다. 그는 직접 흙을 반죽한 것을 물레에 돌려 앙증맞은 작은 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미음을 두 개 그려 넣은 후 유약을 발라 건조시켰다.


ㅁ ㅁ


   미미의 아버지는 어린 미미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간에 조심스럽게 뒤 돌려 눕힌 뒤 등 언저리에 피어난 작은 꽃을 뿌리 째 들어내어 분에 옮겼다. 미미는 조금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금방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 꽃을 분에 옮겨 심어도 미미의 날갯죽지에서는 계속해서 식물이 자라났다. 어느새 미미의 집은 화원처럼 푸른 식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미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안 곳곳에 식물들을 두었다. 안방 침대 옆 머리맡에 두 개, 주방 테이블 위에 두 개, 찬장 위 네 번째 선반 안에 하나, 앞 베란다 창 앞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섯 개, 현관 문 앞에 세 개, 앞마당에 나란히 세 개. 미미네 집은 화분으로 가득했다. 화분이 없는 자리가 없었다.

   미미의 어머니는 정원에 땅을 파고 작은 인공 못을 만들어 두세 마리의 금붕어를 풀어 놓았다. 작은 연못 가운데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조그마한 인어 석상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엄마, 인어가 움직여요.”

“미미, 그런 일은 없어.”

어린 미미는 작은 연못을 좋아했다. 연못을 두고 나자 집 안에는 여러 종류의 곤충들이 살게 되었다. 가끔은 개구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밤에는 풀벌레들이 울었다. 벌레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미미의 부모는 고심 끝에 정원 옆 작은 공터를 사서 독립된 화원을 운영하기로 했다.

   화원은 한동안 성황을 이루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미미의 날갯죽지에서는 더 이상 싹이 돋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싹이 자라난다고 해도 화분에 옮겨 심으면 죽어버리고 말았다. 한번은 도둑이 들기도 했다. 도둑은 꽃을 훔치기만 하지 않고 덜 자란 식물의 뿌리를 뽑고 흙을 엎어 화원을 어질러놓았다. 미미의 아버지가 마대 자루를 들고 잠복해 있다가 범인을 잡았는데 옆집에 사는 남자아이였다.

“왜 꽃을 훔쳤니?”

“화분에 새겨진 네모가 꼭 눈 같아요. 나를 보고 있잖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그저 글자 미음 두 개더군요. 괘씸하더군요.”

아버지는 남자아이의 머리통에 세게 꿀밤을 주었다. 아이는 엉엉 울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로도 종종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에 한 노인이 미미네 화원을 찾았다. 매부리코에 커다란 사마귀가 달린 못생긴 노인이었다.


“화원을 내게 파시오.”

미미는 노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짙은 안개처럼 어두운 파랑 눈을 가진 서양 노인이었는데 하얗게 샌 긴머리를 하고 있었음에도 어린 미미로써는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 남부 지방에서 왔으며 세계 곳곳에서 화원이나 농원, 저수지를 매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네에서는 이 기묘한 노인의 성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미미의 어머니만큼은 확신에 찬 어조로 그가 여자라고 주장했다.

“여자가 맞아요. 할머니의 귀를 가지고 있잖아요.”

미미는 할머니가 인어라고 생각했다.

“엄마, 할머니는 인어에요.”

“미미, 그럴 리가 있겠니?”

“할머니의 진파랑 눈은 인어 석상의 눈과 닮았어요.”

미미네 화원은 어두운 파랑 눈의 서양 노인에게 꽤나 괜찮은 값으로 팔렸다. 그즈음 어깨 죽지에 식물이 잘 자라나지 않는 것 말고도 미미의 몸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젖꼭지가 간지럽고 아팠다. 싹이 돋아나기 전이면 항상 어깨와 등이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던 미미는 혹시 젖꼭지에서도 꽃이 필까봐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머지않아 미미의 초경이 있었는데 생리가 끝날 때마다 날갯죽지에서 싹이 새로 돋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싹이 자라나고 꽃이 피다가 시들더니 곧 죽어버렸고 그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떨어지는 장미 꽃잎사귀처럼 검고 붉은 피가 아래로 쏟아졌다.


*


올가와 미미는 댈러스 국제공항에서 환승 표지판을 따라 걷고 있다. 장장 열다섯 시간의 비행에 몸과 마음이 지친 둘은 말이 없다. 처음부터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미미는 올가와의 대화를 즐긴다. 올가는 매력적인 수다쟁이이다. 미미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 빈집과 어딘가에 홀로 남겨진 애인 이야기를 하고 올가는 미미가 다니는 미용실에 대해 묻는다.

“머리를 염색한 거야? 아니면 원래 색깔인 거야?”

“염색을 했어요.” 미미는 종종 거짓말을 한다.

공항에는 사람이 없어 한산하게 느껴진다. 전쟁이라도 난 걸까. 그 많던 여행객들은 어디로 갔을까.

“공항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 처음 봐요.”

“그래? 나는 살면서 아주 많이 봤어. 흔한 광경이야.”

“무슨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 같아요. 우리 둘만 모르는.”

“왜 좋은데. 공항 전체를 매입한 것 같은 기분이잖아. 봐. 우리가 이 댈러스 국제공항의 주인이야. 아프리카 커피 농장을 사면 이런 기분일까?”

미미는 올가의 들뜬 기분에 동요되는 것 같다. 둘은 앞으로의 여정에 앞서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한다.

“진짜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냐. 자기가 몰라서 그래. 아까부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어.”


   미미는 올가와 보폭을 맞추면서 뒤를 돌아본다. 정말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청년이 하나 보인다. 청년은 아주 커다란 하얀색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걷고 있다. 한쪽 발을 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휘청휘청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옅은 회색 스카프를 코까지 올려 쓰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는 몹시도 지쳐 보인다. 가까이 가면 분명 헉헉 헐떡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좀 위태로워 보이는데.”

“아냐. 아주 건강해.”

“아뇨. 건강하지 않아요.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메고 다리를 절면서 헐떡거리고 있잖아요. 꼭 무슨 조각 석상을 메고 가는 것 같네.”

조각 석상 하니 애인이 만든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나는야 강변의 조각가(A sculptor nearby river). 비너스여 사라지지 말아요(Don’t leave me. Venus). 나의 거품 같은 꿈(My bubble-dream).

“아냐. 저건 악기야. 그리고 쟤는 젊어. 괜찮아.”

“아니에요. 아주 어린 사람은 아니에요. 저 스카프에 그려진 무늬를 보세요. DAHL이라는 로고에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회사의 제품을 쓰지 않아요.”

“DAHL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수건 회사야.”

“그러니까요. 저 스카프 브랜드는 할머니들이 좋아한다고요.”

“그런데 왜 스카프를 둘러매고 있지? 무슨 전염병이라도 도는 것처럼.”

미미와 올가는 Z21 게이트에 도착한다. 공간은 한산하지만 환승하러 오는 길에 비해 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띤다. 둘은 각자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게이트 앞 의자에 앉는다. 올가는 목에 끈을 달아 메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쳐 쓰고 배낭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한다. 미미는 보라색 블루투스 헤드셋을 꺼낸다. DAHL도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올가는 그가 풀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나지막하게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듣는다.

“봐. 목장갑을 끼고 있어.”

자세히 보니 DAHL은 목장갑을 끼고 있다.

“Gosh. 이 여름에 목장갑이라니!”

“올가, 목소리를 좀 낮춰요. 다 듣겠어요.”

“좀 들으라지. 이렇게 더운데 목장갑을 끼는 사람이 있다니! 목장갑은 우리 외삼촌이 끼던 건데. 외삼촌은 목수였어. 나무를 베고 톱질하고 가지를 베고 이고 지고 나르고 한데 모아 가지런히 묶고 삼륜 트럭에 실어서 시내에 내다 팔았지.”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Passengers heading to New Orleans, please check in.”

올가와 미미는 각자의 발치에 내려 둔 배낭을 다시 어깨에 둘러맨다. 얼마 되지 않는 승객들과 함께 둘은 탑승구를 향해 간다. 국제선에 비해 대륙 안에서 비행하는 국내선은 더 비좁다. 배낭이 커서 미미는 조심스럽게 기내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올가는 지나갈 때 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바람에 사람들은 짜증이 나서 “Excuse me” 한다. 올가는 주변머리가 없는 부주의한 할머니이고 서양인들은 낯선 이와의 접촉에 민감하다. 올가가 승무원에게 묻는다.

“실례합니다. 이 친구의 자리는 J10이고 저는 K11인데 제 자리를 J11로 옮겨도 될까요? 승객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요.”

“고객님, 죄송합니다. 전염병이 돌고 있어서 거리두기를 규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K10으로 옮기는 것은 어떠실까요? 친구분의 바로 뒷자리네요.”

미미는 늙은 올가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걱정을 한다. 그래서 올가에게 아쉽지만 떨어져 앉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올가는 좀 고민하는듯하더니 알겠다는 신호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승무원에게 말한다.

“Sorry. Never mind for this.”

“Ok, Sound’s perfect! Please let me know if you need anything.”

“Sweet.”

올가는 스위이잇 하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요즘 아가씨들은 참 예쁘기도 하지. 이 나라의 승무원들은 좀처럼 젊지 않은데 저 아가씨는 유독 어려 보이네.”

미미는 목소리를 낮추고 올가에게 말한다.

“올가, 전염병이 돌고 있대요. 그런 소식을 들었어요?”

“아니? 전혀.”

올가와 미미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들은 신문도, SNS도 접하지 않는다. 그들은 21세기 정보산업 시대에 무지한 예술가들이다. 예술가가 거리에서 괄시받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좀처럼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정작 아무도 관심 없는 대상에 불필요하게 사로잡히며 때때로 병적으로 집착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일이기도 하다.

“전염병은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어릴 적에 홍역도 앓고 수두도 앓고 볼거리도 앓아 봤지만 그것보다 애를 낳는 게 더 고통스럽더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올가는 여전히 아가씨 승무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우리 헬스장에도 아가씨들이 참 예쁘지. 아주 젊지도 않아. 한 마흔은 되어 보이는 아가씨들인데 레깅스를 입은 엉덩이가 타조 알처럼 귀엽고 동그래.”

올가는 두 손을 들어 허공에 동그란 형태를 만들어 보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올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다. 미미는 헬스장에서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중에 올가를 처음 만났다.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늙은 올가는 런닝머신 위를 맵시 나게 걸었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올가는 우아한 할머니였다. 그리고 미미에게 쉴 새 없이 대화를 청했다. 미미는 그가 능수능란한 수다쟁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뜨거운 여름 햇빛 아래 붉게 피는 능소화, 붉은 꽃들 위로 떨어지는 장대비와 담벼락 옆 하천 물줄기, 한낮 빛이 부서지는 강물 위를 낮게 나는 왜가리, 온 힘을 다해 산란의 장소로 헤엄하는 연어들…. 때때로 올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미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을 꺼내어 메모하기도 했다. 올가는 미미에게 좋은 영감을 주었으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자기 몸에는 비밀이 있지?”

미미는 몸에 식물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일종의 결함이라고 생각해왔고 그것은 무의식중에 미미에게 뿌리 깊은 콤플렉스가 되었는데 올가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 등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자라나요.”

“나도 그렇거든.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올가는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켰다. 미미는 올가의 꼬리뼈에 돋아난다는 지느러미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느러미 덕분에 미미는 올가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고 그것은 둘 사이에 견고한 신의를 만들어 주었다.


   조금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비슷한 범주로 미미는 빛나는 것들을 좋아한다. 은이나 금, 수정, 옥, 호박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것들을 미미는 좋아하고 그런 면에서 올가가 귀중하게 여기는 아름다움은 색다른 매혹으로 들렸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찬탄을 위해서는 못생기고 삐뚤어진 것들을 끄집어내 함께 빗대지 않을 수 없었다. 견주어지는 것들이 있을 때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그들의 정오의 만남은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에서 삶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진 후 마지막에는 서로를 위한 애정 어린 격려로 마무리되었다.

   “돌아보면 나는 착각 속에 살았어. 모든 것이 나의 오해였지 뭐야. 어느 날 나는 그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는데 견딜 수가 없이 괴롭더군. 병원에 갔더니 갱년기 증상이니까 호르몬 조절을 하면 나아진대. 하지만 내가 볼 때 단순히 갱년기 증상이 아냐. 세월은 내게 새로운 두 개의 눈을 준 거야. 예전에 동그랬던 두 눈이 이제는 네모로 변해 버렸지. 둥근 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예리한 모서리가 이제는 진실이 되어 내게 돌아온 거야. 견고한 원형을 되찾은 채로.


ㅇ ㅇ


ㅁ ㅁ


그래서 나는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어쩌면 나의 남편도, 자식들도 그저 액자 속의 초상처럼 단지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올가는 삶이 어땠을지 겪어보지 않은 미미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즈음 미미는 서른의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미미의 삶은 더욱 뾰족뾰족하고 아찔해져만 갔다. 그것은 날갯죽지에서 자라나는 식물들과 비슷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화분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 미미는 낡은 화분 하나로 오랜 시간을 버텼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질긴 식물들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길쭉한 산새비에리아 스투키, 진한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알로에, 간혹 뾰족한 가시를 가진 선인장이 자라나기도 했다. 스투키는 미미의 날갯죽지에서 석 달, 넉 달을 거뜬히 버텼다. 애인은 헝겊에 물을 적셔 군데군데 금이 간 화분을 닦아주고 흙 속의 거친 돌 따위를 솎아내 주기도 했다.

처음으로 스투키가 자라난 날에 미미는 평소보다 등이 무겁게 느껴진다고 애인에게 털어놓았다. 애인은 거짓말을 했다. 당신의 날갯죽지에는 지난번처럼 붉은 꽃이 피었어.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미미 자신도 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올가는 거짓말을 못했다.

“옷에 빵꾸가 났네? 자기 등 뒤에 가시 같은 게 올라왔어!”

미미는 비로소 그것이 스투키임을 알게 되었고 떼어낼 방법도 몰랐지만 떼어낼 동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스투키는 나날이 자라서 혹처럼 돌출해버리는 바람에 마치 작은 돌덩이라도 등에 매달린 것처럼 미미의 몸은 무거워졌다. 거리를 걸을 때 사람들은 미미를 쳐다보았다. 미미의 등 뒤로 흉하게 돌출한 무언가를 본 사람들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미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고 재차 미미의 뒤를 확인했다.

“What would you like for drink?”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부터 리즐링 와인을 마시고 싶다던 올가는 작은 플라스틱 잔에 자신을 깊이 잠들게 할 물약을 두 손으로 예의 바르게 건네받고는 천천히 홀짝이고 있다. 미미도 앞 좌석 의자에 두꺼운 반다나로 두세 번 겹쳐 덮은 이마를 대고 나름의 휴식을 취해본다. 눈을 감고 헤드셋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음악에 집중한다. 둘의 좌석에서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DAHL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승무원에게 사과 주스를 달라고 요청한다.


“Apple juice please.”

하지만 사과 주스가 없는지 승무원은 프론트 덱에 확인을 하러 다니느라 분주해보이고 그럼에도 사과 주스는 찾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Anything else other than apple juice?”

DAHL은 사과 주스 말고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승무원은 그냥 자리를 떠나기 미안했는지 작은 플라스틱 잔과 페트에 담긴 미니 생수병과 냅킨을 남겨 두고 간다. 승무원이 두고 간 생수병은 비행 내내 그대로 놓여 있다. 착륙하기 직전 자리 앞에 놓인 책상 받침을 접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DAHL은 생수를 자신의 거대한 배낭의 오른쪽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는다.

얼마 되지 않는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난 후에도 올가는 깊은 잠에 빠져있다. 미미는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 메고 올가를 천천히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세요. 우리는 뉴올리언스에 왔어요.”

올가는 눈을 꿈뻑거린다.

“꿈을 꿨어. 깊은 물 속에서 헤엄을 했어.”

“바라던 대로 될 거예요. 우리는 미시시피 강에 갈 거예요.”

미미는 천으로 만들어진 올가의 작은 배낭을 건넨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올가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모양인지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수화물을 찾는 중에도 그는 말이 없다. 각자의 작은 트렁크를 끌면서 둘은 공항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DAHL은 여전히 미미와 올가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보폭이 좁아진 탓에 가까이서 보니 그는 히스패닉이다. 어쩌면 그는 인도나 파키스탄 쪽의 서아시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DAHL 스카프를 턱 아래로 내려 벗겨낸 뒤 그 무딘 얼굴을 드러내고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와 알 수 없는 언어로 화상 통화를 한다. 자세히 보니 그가 짊어지고 가던 하얀 가방은 올가에 말대로 어떤 종류의 악기 같아 보인다. 그의 눈가에는 지저분하게도 눈곱이 끼어 있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주름은 그의 얼굴을 불쌍해 보이게 한다. 하지만 주름만으로 그의 나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눈가 주름이 유독 많은 젊은이들도 있지 않은가.

셋은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탑승한다. 버스에는 기사의 운전석 쪽으로 두 열의 의자가 붙어있고 오른쪽 창 옆에는 한 열로 의자가 줄지어 있다. 올가는 기사의 바로 뒷자리에 앉는다. 미미는 바로 그 뒤에 앉는다. 미미의 자리 맞은편 오른쪽 의자에는 DAHL이 자리 잡는다. DAHL은 무언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한쪽 다리를 떨고 있다. 버스가 출발한 후에도 DAHL은 무언가 불안해 보인다. 창밖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짧게 잘린 머리를 목장갑 낀 손으로 반복해서 매만진다. 중대한 만남을 앞 둔 사람처럼 DAHL은 초조해한다.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여보니 올가가 잠에 들어 코를 고는 소리인 것 같다. DAHL은 주름을 만들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다. 잠시 뒤에 DAHL이 외친다.


“이봐요. 좀 시끄럽군요.”

올가는 DAHL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잠잠해진다. 미미는 등이 간지럽다. 창밖에는 초여름을 시작하는 초록의 생명이 가득하다. 초록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날갯죽지는 다시 견딜 수 없이 가려워짐과 동시에 미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기분은 어떤 자신만만함과 관련이 있다. 마치 세상 어떤 일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다. 고요하며 여유 만만해지는 풍요 속에서 미미는 평안을 느낀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사귀들의 무리는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미미의 일상에서의 하찮은 상념들은 사라진다. 불필요한 생각들은 하늘 위로 증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들은 다른 색채로 물들어간다. 깨끗한 백지처럼 아무것도 없던 자리 위로 안개처럼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는다. 소나기가 와락 덮칠 것처럼 우울하고 느린 전조로 미미의 눈앞은 점점 부옇게 흐려진다. 어느새 미미의 기분은 좀 울적해진다. 상념들이 사라진 자리는 다시 새로운 상념들로 채워진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미미의 역사에는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의 예감이 마음에 도사린다. 미미의 마음은 알 수 없이 슬프다.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은 평화와 비애의 소용돌이를 이리저리 넘나든다.

올가는 피곤했는지 다시 코를 골기 시작하는데 아까보다 요란하게 코를 곤다. DAHL은 쉽게 체념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자기만 아는 언어로 무어라 반복해서 투덜거린다. 퉁명스러운 짜증 소리와 함께 그는 발로 바닥을 쿵쿵거린다. 그가 요란하게 여러 번 버스의 바닥을 내리치는 바람에 기사도 백미러로 그에게 흘끗 눈길을 준다. DAHL은 주먹으로 버스의 벽면을 내리치기 시작한다. 그는 몇 차례 더 벽을 두들긴다.

“Hey, What’s wrong with you?”


기사가 큰소리로 외친다. 올가는 그 소란에 깼는지 DAHL 쪽을 뒤돌아본다. 둘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다. 코고는 소리와 DAHL의 발 구르는 소리, 그리고 주먹을 치는 소리도 잠잠해지니 버스 안은 엔진 소음만 가득해진다. 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주시한다. 올가의 안개처럼 푸른 눈은 매섭게 꾸짖는 듯 보이지만 매우 슬픈 것 같기도 하다. 이내 올가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정면을 향해 돌아앉는다. 그리고 더 이상 잠에 들지 않는다. DAHL은 잠잠해진다.

미미는 음악의 볼륨을 높여놓고 차창에 반다나로 감싸진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는 이 모든 사소하고 불안한 낌새를 알지 못한다. 애인이 만든 노래를 듣는다. 내 사랑. 아프로디테. 영원히 아름답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DAHL은 하차한다. 미미는 버스에 달린 거울을 통해 도로변을 따라 걷는 DAHL의 모습을 바라본다. DAHL 스카프를 얼굴에 두르고 목장갑을 꼈으며 거대한 악기를 메고 걷는 DAHL이 점점 작은 점으로 사라져간다. 버스는 계속 달린다. 조금 더 있다 보니 강이 보인다. 어두운 옥색의 강이 넓게 펼쳐진다. 강물 위로 나지막한 파도들이 쉼 없이 일렁거린다.  

미시시피 강변에 버스가 정차하자 미미와 올가는 내린다. 올가는 허리춤에 달린 복대에서 담배를 한 개비 끄집어낸다. 그가 불을 지피자 작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올가는 깊이 빨아들이고 후 하고 연기를 내뱉는다. 미미는 애인을 생각한다. 어딘가에 홀로 남아 미미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을 애인. 미미는 흥얼거린다.


“A sculptor nearby river singing don’t leave me Venus.”

올가도 덩달아 흥얼거린다.

“A bubble-dream. Don’t leave me Venus.”


“여기에요.”

둘은 작은 포구에서 멈춘다. 그들은 포구 뒤에 놓인 널찍한 나무 벤치에서 짐을 푼다. 미미는 입고 있던 청남방의 단추를 차례로 풀어 벗는다. 올가는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낸다. 미미의 날갯죽지에 자라난 스투키를 뿌리째 떼어내려는 것이다. 미미는 배낭에서 삽을 하나 꺼낸다. 미미는 청남방 안에 입고 있던 민소매 속옷마저 벗는다. 올가는 조심스럽게 스투키를 뽑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제멋대로 자라난 스투키는 그 끝이 뾰족뾰족하다.

“Ouch! 따가워라!”

“목장갑을 끼세요.”

미미는 배낭에서 목장갑을 꺼내 올가에게 건넨다. 미미는 나무들이 심어진 곳을 둘러보다가 한적한 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삽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한다. 올가는 목장갑을 끼고 스투키를 조심스럽게 옮긴다. 미미는 삽으로 흙을 마저 파내니 동그란 원형 돔 모양의 깊은 구멍이 생긴다. 올가는 그 속에 스투키의 뿌리를 고정시킨다. 둘은 파 놓은 흙을 다시 제자리로 쓸어 담아준다. 작고 낮은 흙무덤이 생겨난다. 둘은 이제 막 새로운 안식처에 자리를 잡게 된 산새비에리아 스투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바람이 나직이 불어 올가의 희게 샌 머리칼과 미미의 헝클어진 초록 머리칼이 흩날린다.


“정말 두고 갈 수 있겠어?”

“그럼요. 잘 자랄 거예요.”

둘은 다시 포구 뒤에 놓인 벤치에 앉는다. 미미는 새삼 강의 폭이 아주 넓다고 느낀다. 한쪽 목장갑을 벗은 손으로 여전히 목장갑이 씌워진 손을 매만지면서 올가가 입을 연다.

“결함을 결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어. 처음에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이해가 되더군. 완전하고 고약할 결함을, 해소할 수 없이 썩은 물처럼 고여 내 안에 그득했던 그 끔찍함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그러니 우리는 매사 관대해질 수밖에.”

“그 사람은 누구에요?”

“첫 번째 남편. 난 아들을 두고 왔어. 찬장에 쌓인 먼지를 후 불어내듯 그저 모른 체 털어버리면 내 안의 악도, 죄도 찰나에 불과할 뿐.”

미미는 올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날갯죽지가 다시 간지러워졌다. 날갯죽지가 간지러워 애인에게 물으면 애인은 당신의 등에서 다시 꽃이 피네. 하고 웃었다. 미미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있을 미미의 애인.

“너무 간지러워요. 다시 뭔가 올라오려나 봐요.”

올가는 잠시 벗은 미미의 뒤를 확인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그럼 지금이 신호인거지?”

둘은 배낭에서 각자의 스노쿨을 꺼낸다. 올가가 먼저 강물에 든다.

“오리발은요?”

“그런 건 필요 없어.”

오리발을 신은 미미가 뒤뚱거리며 강 모레 위를 걸어 올가의 뒤를 따른다.


ㅁ ㅅ ㅅ ㅍ


*


   미미는 Cafe du Monde에 앉아 접시에 놓인 베니에를 하나 베어 문다. 미미의 붉은 입술 위로 하얀 가루가 잔뜩 묻는다. 입술 가득 달콤한 것들을 혀로 빨아 먹으면서 그는 애인에게 보낼 엽서를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쉼 없이 헤엄쳤어. 강 반대편이 나올 때까지. 미시시피 강은 바다처럼 넓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 물속에서 나는 올가의 벗은 엉덩이에 매달린 기다란 지느러미를 만져볼 수 있었어. 짐작은 했지만 만져본 건 처음이었어. 물에서 나왔을 때 올가는 없더라고. 올가는 제자리로 돌아간 거야.

나는 올가의 트렁크를 챙겨서 시내의 광장으로 나와 당신에게 보낼 엽서를 하나 샀어.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가 그려진 엽서야. 프렌치 쿼터는 당신이 아주 좋아할 만한 곳이야. 우리가 이곳에 함께 올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미미가 아니야. 나는 미음에서 피읖으로 옮겨간 사람이라고. 피피라고 해도 되고 푸푸라고 불러도 괜찮아. 당신이 좋을 대로 해줘. 하지만 미미가 아닌 ㅍㅍ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난 ...



   뉴올리언스에서는 거리 어디에서든 흑인들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가 있다. 크고 작은 공연이 다양해서 취향에 맞추어 듣는 재미가 있다. 미미는 애인을 생각하느라 땅만 보고 걷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매력적인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아랍의 흥취를 가지고 있는듯하면서도 레게풍의 곡조가 섞인 재즈다. 소리를 따라간 자리에는 DAHL이 있다. 그는 눈을 감고 나무로 만든 거대한 악기의 현을 손으로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깊은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미미는 연주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쪽 손으로 끌고 있던 올가의 트렁크를 연다. 가방 안에는 작고 단단한 사과들이 가득하다. 미미가 DAHL이 가져다 놓은 양동이 안으로 쏟아 넣자 사과들이 와다다 떨어지면서 양동이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놀란 DAHL이 미미를 본다. 미미가 큰 소리로 묻는다.


“Would you do me a favor?”

DAHL은 느린 걸음으로 미미에게로 다가온다.

“내 날갯죽지에서는 풀이 자라나. 지금 어떤지 봐줄래?”

DAHL은 조금 머뭇거리는듯하더니 미미의 등 뒤를 확인해준다.

“당신의 날갯죽지에는 붉은 꽃이 피었어요.”

미미는 배시시 웃는다.

“It looks like a ruby.”

미미는 끌끌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끝 (9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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