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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Aug 31. 2021

버스와 침대 그리고 나무

눕지 못하는 침대와 나무들이 보이는 버스 안


사람들은 누구나 뒤통수에 침대를 달고 산다. 우리가 아는 침대는 각자의 아늑한  안에 가로로 반듯하게 누워있지만  뒤통수 침대는 뒤통수 부분에서 허리춤까지 세로로 세워져 있다. 마치 거대한 안방 장롱처럼 우뚝 직립한 채로 놓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뒤통수에 달린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하지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때는 침대에서 거리상 아주 멀리 떨어져 나와 있는다. 우리는 종종 타인과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게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면서 이야기를 쉬지 않고 이어간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각자의 마음은 서로의 세계 속에 씨앗처럼 흩뿌려진다. 타인과의 대화는 혼자만의 사색과 아주 다르다.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에 집중할  누군가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실제로 침대에서 떨어져 나와 눈알 뒤편에 대자로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방의 음험한 모략을 엿듣는 정치인처럼 찰싹 귀를 대고 있다.)


사람들은 잠자리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지거나 꿈을 꾸기도 하는데 이때 비로소 뒤통수 침대에 두툼한 이불을 덮고 드러누울  있게 된다. 이때  맨발이 허리춤까지 간당간당하게 닿게 되고 살갗의 피하 지방을 건드려서 간지러워진 탓에 사람들이 자다가도 등을 긁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뒤통수에서 목덜미까지 직립해 붙어있는 침대를 상상해보길.

누구나 똑같은 침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에 수많은 침대 회사들이 다양한 재료와 모양의 침대를 있듯이 모두가 다른 침대를 가지고 있다. 어떤 아이는 아주 크고 쿠션감이 훌륭한 침대를 타고나지만  다른 아이는 스프링이 거의 부러져서 자다가 몸을 뒤척일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는 침대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소리는 처음에는 조금 거슬린다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거의 없어진 것처럼 조용하다. 마치 억척스러운 침묵 같달까.


사람들은 침대를 엄마의 자궁에서부터 선물 받는다.  신생 가구의 튼튼함의 정도는 자궁의 온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어떤 엄마는 아이를 뱃속에 가진 후로 내내 춥게 지내는 바람에 아이의 침대가 형편 없어지기도 하는데 불쌍한  아이는 휴식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수가 없는 운명을 타고 난다.


나의 경우 뒤통수에는 침대 대신  나무가 하나 드러서 버렸다. 나무는 가지가 아주 많고 이제는 기둥에 서른 개가 넘는 주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느  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실을 눈치챘는데  밖의 수많은 나무들이  뒤통수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나무들이 나를 향해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뒷덜미가 간지러워서 벅벅 긁어 댔고  피부는 아주 벌겋게 발진이 되는 바람에 그날  엄마의 도움을 받아 오이 마사지를 받아야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영혼을 쉬게  휴식처가 영영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이웃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자기 만의 뒤통수 침대에 따뜻하게 몸을 뉘이며 달콤한 휴식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도무지 휴식을 취할  없었고 깊은 잠에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매번  때마다 꿈을 꾸었다. 그것은 내가 뒤통수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쉬고 있을 때이다. 봄과 여름에는 순하고 여린 초록의 풀들이  영혼과  영혼의 가련하고 얕은 잠을 다독였으나 겨울나무는 조금 다르다. 거칠고 뻣뻣해진 늙은 나무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남들에게 나눠줄 것이 하나도 없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늙은 나무에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몸이 닿은 즉시 아주 멀리 튕겨나가버리고 말았다. 내가 튕겨 나간 공간은 아주 어두웠고 나는 그것이 CHAOS임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눈과 뒤통수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틈이었고 좁았다. 그곳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다리의 길이가 조금씩 달라서 앉자마자 몸이 좌우로 조금씩 기울었다. 삐그덕 삐그덕 좌우로 흔들리는 의자에 나는 내가 아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엄지 손가락을 쪽쪽 빨았고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나는 정말 불안했고 무서웠다.


 틈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계절은 가을이었고 나는 단풍나무  팔처럼 뻗친 왕가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수첩과 연필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없다. 그것은 폐허의 깊고 어두운 기억에 대한 되새김이며 각인이다. 하지만 쓰지 않을  없다. 생각해보니 나의 나무는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다. 돌고 돌아도 끝이 없는 . 쓰고 쓰고  쓰다 보면 글은  안에서 자기 만의 길을 찾게 되는데  길은 시간의 영향권 바깥에 있다. 그래서   위에 있자면 나는 가을 다음에 여름으로 거꾸로 뛰어넘을 수도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글을 쓰고 이윽고 시간을 뛰어넘는  위에 서며  짧은 순간의 엑스터시를 만끽한다.  시간은 아주 짧은데 불교에서는 찰나라고 부르며  뜻은 ‘시간의 최소단위이다.


 위에는 초록의 순한 나무들이  팔을 하늘로 뻗고 이리저리 춤을 추는 광경이 펼쳐진다. 나는  손을 높게 뻗어 함께 춤을 추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때 사방에서는 투명한 빛들이 폭포수처럼 와아아 떨어진다. 초록의 아기 나무들과 나는 눈을 감고 우수수 내려오는 빛들을 만끽하고 계속해서 몸을 흔든다. 틈의 공간이 비좁은 탓에  시간은 아주 짧게 끝나버리고 이내 공간은 무너진 집처럼 움푹 꺼져버린다.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고 말지만 그래도 나는  춤사위를 오래오래 기억했고 나중에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침대가 되지 못한 나의 뒤통수 나무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날의 빛과 바람을 영원히 그리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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