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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Jan 03. 2024

돌아갈 곳

출근이 좋아지는 날은 아마도 ‘마지막 출근 날’말고는 없을 것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출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들이 나를 회사에 옮겨다 놓을 뿐.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은 ‘가다가 심각히 다치지 않을 정도로 차에 부딪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어디선가 봤는데 이것이 우울증 초기 증상이라던데 이런 마음이 든다면 조심하세요) 그 마음이 극에 달했던 날,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하는 시간까지 대책 없이 누워있다가 일어나 팀장님께 아파서 못 갈 거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딴에는 치밀해 보이려고 시간도 계산하고 급성장염이라는 흔하지만 그럴싸한 병명도 댔다. 말 때문인지 거짓말이 들킬까 걱정돼서 였는지 실제로 배도 아픈 것 같았다. 다행히 시계랑 사진을 찍어보내라거나 진단서를 보내라는 말 대신 ‘푹 쉬어라!’라는 답이 왔다. 답을 받자마자 씻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 본가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평일 오전 버스를 타는 순간 없지만 있었던 급성장염은 씻은 듯 나았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어쩐 일이야? 출근은?’이라 물었고 ‘어 쉬는 날이야’라고 답했다. 평일 낮에 일어난 작지만 갑작스러운 사건에 대한 대화의 전부였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일어나서 엄마랑 무한도전을 보며 과일을 먹었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온 저녁에 다 같이 식사를 했다. 늘 있던 공간에서 자주 먹던 것들로 배를 채우고 오래도록 봐온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여전히 싫은 출근을 엊그제보단 씩씩하게 해냈다.

스무 살, 처음 서울에 왔다. 그때 서울에 쭉 살아온 동기나 선배들이 꽤 부러워했다. 아주 낯선 이 도시에 익숙한 그들의 일상도 일상이었지만, 가족이 있는 집과 편안한 동네를 매일 갈 수 있다는 게 제일 부러웠다. 요란하게 놀다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 만취한 금요일을 지나 정신이 든 토요일 오후에, 별거 아닌 일들로 마음을 쓸 때에 특히 더 그랬다. 그리고 스스로 집값과 생활비를 해결해야 하는 회사원이 되고 나서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십몇 년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내며 이 도시도, 혼자서 지내는 삶도 익숙해지고 좋아졌다. 언젠가 명절 즈음 회사에서 밥을 먹다가 선배가 물었다.


"원주 언제가?"

"일 없으면 일찍 가야죠"

"좋겠다. 나는 고향이 있는 게 부러워. '고향에 간다'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같어. 먼 시골에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어"

"서울이 고향인 게 더 좋죠"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저 말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렇구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큰 기쁨이구나.'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러니까 나의 인생의 일부가 멈춰진 채 오랫동안 남아 있는 곳. 내가 어떻게 됐든 괜찮다 말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줄 사람이 있는 곳. 살아남기 위한 내가 아니라 본연의 나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곳. ‘보고 싶다 돌아오라’라고 말하는 명동콜링 가사처럼 나를 기다려줄 거 같은 곳. 할머니 무릎과 한 여름의 낮잠 같은 기분이 느껴질 거 같은 곳. 어떤 위로의 말없이도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토닥여줄 거 같은 곳. 도망치고 싶을 때 진짜로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의 아이에게도 우리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존재로, 오랫동안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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