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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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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Sep 18. 2023

일상절기

어릴 땐 계절이 빨리 지나길 바랐다. 밖에서 노는 게 전부였던 그때 계절을 다 써버리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계절은 그저 날씨나 온도 정도에 불과했지 그때의 맛이나 분위기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제철음식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고 하늘을 보는 일 보다 만화영화를 보는 게 더 좋았으니까.


조금 더 자라 계절을 끌어안고 즐기는 법은 알았지만 계절의 길이가 서로 다른 것이 아쉬웠다. 좋은 시절은 잠깐 사이에 빠르게 지나가고, 그렇지 않은 시절은 늘 천천히 지루하게 영원할 것처럼 흘렀다. 내게는 특히 여름이 그랬다. 열두 달을 4개월씩 잘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부르고 계절이 끝나고 시작되는 날 밤새 축제를 열면 좋겠다고 여러 번 쓰고 말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이도저도 아닌 날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시절에 대한 편애와 편식은 더 심해졌다.


계절이 대놓고 자신을 뽐내던 때에도 사무실에 갇혀있거나, 집에서 숙취에 시달리던 때. 계절의 끝에서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라는 말을 내뱉고, 다음과 내년을 기약했다. 벚꽃은 출근길 정류장에서, 단풍은 남산터널을 지나는 버스에서 보는 게 전부였던 정신없이 바쁘던 그때 계절은 그냥 옷을 바꿔 입는 신호거나 '제철음식'과 함께 술에 취하는 핑계 정도였다. 그런 삶이 이어질수록 계절은 그립고 애틋한 존재가 되었고, 가끔 아니 자주 일상의 이유가 되기 시작했다.


봄이 시작될 즈음에 부는 바람 냄새, 여름이 끝날 무렵의 햇살 온도, 비가 그친 뒤 공원의 습도, 가을 정점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색감, 돌을 던지면 쨍하고 깨질 것 같은 겨울날 공기의 밀도까지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을 살뜰히 챙기려고 애쓴다. 계절은 절대 기다려주는 법이 없으므로 그것이 설익든 끝물이든 기회가 되는 대로 계절을 온몸과 마음으로 마주한다. 식탁이든 공원이든 창가든 바닷가든 산이든 어디든 언제든 계절을 쫓아 일상을 채운다.


그리고 요즘은 나만의 방식으로 계절을 쪼개고 나눠 보낸다. 24 절기처럼 '일상절기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파란 테이블에서 술 먹는 계절', '자주 하늘을 찍는 계절', '독립영화 보고 오뎅빠에서 따뜻한 정종을 마시는 계절', '오히려 달리기 하기 좋은 계절'등-이라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제철음식을 챙겨 먹는 거처럼 그때 하면 좋은 혹은 그때 하지 않으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나의 계절이 된다.


그렇게 계절을 즐기고, 기다리고, 사랑한다. 자연 깊이 사는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번에도 몇 번의 계절을 놓치고 아쉬워하겠지만. 늘 그랬듯 먹고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계절을 쫓는 마음이 담긴 '일상절기'는 좋은 인생을 만드는 데 뜻깊게 쓰일 것이다.




해가 지는 저녁을 걷는 일이 좋다.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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