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희 Oct 26. 2023

이제 티비를 켜기로 했다.

최선을 버리고 재미있는 삶을 택했다.

 내 전공은 자그마치 국어 교육이다. 국어든 교육이든 하나만 하더라도 아이를 키우는 원칙이 확고해지고, 독서 교육이나 인성 교육 등 육아에 가해지는 원칙론적 압박이 극히 심할진대 그 두 가지를 다 가진 데다 선천적으로 말 잘 듣는 k-장녀 유전자까지 타고난 나는 우리 사회가 지극히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육아 원칙들에 고분고분 순종하며 아이를 키워 왔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원칙1. 티비는 철저하게 차단한다. - 아이의 시각, 청각이 발달하기도 전부터 그 좋아하던 예능마저도 다 끊고! 아이에게만 오롯이 전념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뇌에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다고들 한다.

 원칙2. 책책책! 책을 많이 읽어주자. - 이때 한글책이든 영어책이든 지적 수준과 글밥은 염두에 두지 않고 양서이기만 하면 상관없다. 이에 사로잡혀 아기띠를 하고 읽어준 책이 다섯 수레는 못 될지언정 다섯 바케스는 될 것이다.

 원칙3. 되도록 엄마 품에서 키우고 기관 생활은 늦게 시작한다. - 엄마 품에서, 엄마의 목소리로, 엄마의 향기를 맡으며 자라지 않으면 아이의 정서에 위험한 변화가 생긴다는 데야 어떻게 편안하게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나는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육아의 원칙들에 호락호락 설득당해 힘든 육아 노동은 근처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쉽고 쿨하게 아이를 키울 거라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그 여리기만 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는 온갖 육아법들의 열혈 신도가 되었다.




 아이는 외부 자극에 호기심이 많았다. 잘 우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고분고분 재운다고 자고, 먹인다고 먹는 아이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낯선 환경에 가거나 약간의 언어적, 시각적 자극만 있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말똥말똥 집중하며 뚫어져라 관찰하곤 했다. 그즈음의 아이 엄마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내 아이의 총명한 눈빛에 반해 그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그 무한한 호기심에 답하고자 책을 읽어주고, 미소 짓는 얼굴로 말을 걸어주며 하루를 채워 갔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에 혼자 엄격한 원칙을 세워 가며  ‘초희-유니버스’ 속에서 아이를 키워 나간 것이다.


 싸움도 갈등도 없는 친절한 대화와 미소, 양서 속 아름다운 언어의 흐름 속에서 아이는 남들보다 빠르고 유창하게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유년기는 ‘초희-유니버스’에서 잘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언제든 문제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나의 노력과 고통은 차지하고서라도 세 살까지 내 품에서 자라다 어린이집에 가게 된 아이는 기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또래와의 소통을 힘들어했고 선생님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했다. 4살짜리 아이가 그저 시키는 것만, 해야 하는 것만 묵묵히 해내며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을 어리석게도 첫 학부모 상담일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집에서는 자신의 의사 표현이 확실하고 표현력도 좋아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이도 나도, 한바탕 열병을 앓는 나날이 길게 이어졌다. 힘겹게 구축해 놓은 모든 육아 시스템을 내 손으로 깨 부수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아픈 일이었지만 쇼생크 탈출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찌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최선을 버리니 자연스럽고 행복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 어떤 교육적인 것을 배재하고 나니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재미들이 우리 일상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과격한 말에도 유희거리를 찾아내어 희희낙락하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고집을 멈춘 지 5년이 지난 다음에야 아이는 차츰차츰 또래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육아에 대한 이야기는 참 어렵다. 우리는 언제고 육아의 한 과정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과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식이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도 계속되는 것이 육아가 아닌가.


 육아는 전 생애를 건 여정이고 실로 끝이 없기에 정해진 답이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아이에 대한 것이 아닌 나의 가치와 관습과 윤리관에 대한 이야기로 정의되어야 한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각종 육아법이 아닌 개별적인 부모의 기준에 맞게 아이를 길러내고 사회 속에 내보내는 것. 그리하여 다양한 가치를 가진 성인들이 사회에서 그들의 생각을 뒤섞으며 우리 세대와 또 다른 문화를 만들고 때로 그것을 진보시키기도 하고 후퇴시키기도 하면서 그들 나름의 역사와 전통, 아픔을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보는 과정이 육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긍정적인 프레임을 제시하고 천편일률적인 육아관을 주입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의 부모 세대와 함께 10대, 20대를 거쳐 오며 그들의 문화와 많은 부분을 공유해 온 나는 반짝반짝하던 우리의 개별성을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부모가 된 순간 유행하는 육아법에 가로막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것들이야말로 육아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드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개성적 자아로 아이를 키워내어 세상에 유일한 한 생명을 만들어 내어야 할 우리는, 저마다의 불안과 온갖 매체에서 제시하는 올바른 육아법이라는 사회적 압박 속에 획일적인 틀에 갇혀 아이를 기르고 있다. 옳고 그름의 잣대는 있어야 하겠지만 단정적으로 ‘안 된다.’, ‘그르다.’, ‘그런 부모는 틀렸다’고 하기 전에 각 가정의 틈 사이로 빠져나온 웃음의 한 조각들을 보아주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엄격한 틀 속에 가둬 놓고 크게 방황하지도 않지만 성장하지도 않는 아이로 키울 것인가 자유인으로서 스스로의 결정에서 초래한 아픔과 고통, 좌절을 겪고 자신만의 ‘관’을 만드는 아이로 키울 것인가. 지금 우리는 부모로서 그 해답을 찾는 과정 속에 있고 그것은 늘 그렇듯 무거운 책임감을 부여할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고도 고맙게도..


'삶의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에게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세대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때로 투쟁하고 때로 연대하며 언젠가의 우리가 그래왔듯 자신들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 찾아나갈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역할은 티브이와 게임, 책과 교육과정 속에서 피 터지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손을 잘 놓아주는 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틈을 열어주고 그저 편안한 쉴 곳이 되어 주는 것이 우리의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티비와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오히려 그것이 힘겨운 경쟁과 질시, 다른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 속에서 지친 아이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쉬어갈 수 있는 대상일 수 있기를, 내가 함께해 주지 못할 어느 순간에, 잠시나마 미소 지을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주기를 조심스럽게 바랄 뿐이다.


"아들, 오늘은 우리 뭘 볼까?"


*사진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조급증과 이별하는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